마음의 여유

배용규 칼럼

지역내일 2000-12-17
지난 일요일, 결혼 잔치에 갔다가 올 때 오랜만에 시내버스를 탔다. 28번 버스 속에는 낯익은 분들이 타고 있었다. 오면서 이야기는 하나 같이 못 살겠다. 비료, 농약, 비닐 등 온갖 농자재 값은 물가 따라 다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은 오리려 내리니 어찌 살겠나? 한가지 농사라도 되는 것이 있어야 희망이라도 있는데 희망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한가지 농사라도 되는 게 있다면 희망이 있다기에 안타까운 심정에서 희망은 버리지 말자고 농사짓는 내 이웃에게 한가지 농사는 그래도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다.
속이 파란 검은콩이다. 2년생 사과나무 사이에 간작으로 심어 놓은 콩이 마흔 말이었다. 서
른여덟 말은 구만원씩에 팔고 두말은 내년에 씨앗과 우리 식용으로 남겨 놓았다. 면적을 적
게 심어 그렇지 벼농사나 과수원 치우고 검은 콩 농사했으면 오히려 나을 뻔 했다. 농사짓
기도 갈수록 어렵다. 사과도 가격이 형성되면 따서 팔면 그만이었었는데 이제는 색깔이 좋
아야 한다고 봉지 씌우고, 잎 따주고 그것도 부족하여 나무 밑에 반사필름을 펴 준다. 콩 타
작을 할 때면 중간 수집상들이 서로 자기에게 팔라고 하고 그 중에 약삭빠른 상인은 아예
콩 타작을 같이 해서 타작마당에서 싫어갔는데 이제는 쪼개진 콩, 덕 익은 콩, 콩깍지 등 이
물질을 깨끗하게 주어서 물에 씻기만 하면 그대로 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손질을 해야 한
다. 올해도 동네 할머니들이 모두 모여 둥그렇게 앉아 이물질을 줍는 일손을 도와주었다. 그
러면 으레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어느 마을에 살림살이가 어려운 아비가 열다섯살 되는 딸을 시집을 보내고 이듬해 또
흉년을 만나 입 하나를 셈치고 아홉 살 짜리 딸조차 민며느리로 시집을 보냈다. 큰딸이 시
집을 가서 콩밭을 메는데 시아버지는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아니
하고 열심히 김을 메는데 호미 자루가 빠졌다. 호미자루를 박기 위해 돌을 찾아보았으나 아
무리 찾아도 없는데 돌아보니 낮잠 자는 시아버지의 번들거리는 이마가 호미자루 박기에는
딱 좋구나 싶어 탁탁 박아 버렸다. 호미 자루야 잘 박았지만 며느리는 그날로 친정으로 쫓
겨오게 되었다. 딸에게 연유를 들은 친정 아버지는 “그놈의 자식 노는 이마빼기 좀 박으면
어떠냐?”고 화를 냈다 한다. 며칠 뒤 작은 딸이 또 쫓겨왔다. 아홉 살 짜리가 밥을 하고 된
장찌개를 끓이는 것까지는 되는데 도대체 장독이 높아서 된장을 떠내기가 힘들었다. 생각다
못한 꼬마 며느리는 자기 키에 맞게 장독 옆구리를 망치를 뚫어 된장을 퍼내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장독 깨었다고 쫓겨왔다고 했다. 딸의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세상에 별놈도
다 있다. 키 작으면 구멍 뚫어 옆으로 퍼 낼 수도 있지. 그놈의 집구석엔 주전자는 한평생
못쓰겠구먼”이라고 했다.
짧은 옛날 이야기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한해를 보내면서 어려운 때일수록 나는 너
입장이 되어보고 너는 내 입장이 되어보는 작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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