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초기' 검색결과 총 9,846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주공입주민 합동결혼식 거행 대한주택공사(사장 최재덕)는 2일 오후 주공 본사 대강당에서 주공아파트 입주민 9쌍을 위한 합동결혼식을 개최했다. 그간 주공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주공아파트 입주민을 위해 매년 합동결혼식 행사를 마련해오고 있으며 올해로 6회째를 맞이했다. 김병국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9-03
- 사진기사(합동결혼) 주공입주민 합동결혼식 거행 대한주택공사(사장 최재덕)는 2일 오후 주공 본사 대강당에서 주공아파트 입주민 9쌍을 위한 합동결혼식을 개최했다. 그간 주공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주공아파트 입주민을 위해 매년 합동결혼식 행사를 마련해오고 있으며 올해로 6회째를 맞이했다. 사진 대한주택공사 제공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9-03
- 서울시 저출산 대응 정책 국제포럼 서울시는 3~4일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과 서울여성가족재단 국제회의장에서 ‘세계 대도시의 저출산 현황과 정책대응’이라는 주제로 국내외 전문가 초청 국제포럼을 연다고 2일 밝혔다. 포럼에는 개빈 존스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와 조은희 서울시 여성가족정책관 등 전문가 200여명이 참석해 아시아 및 유럽의 가족정책과 서울시의 다자녀 가족 지원제도 등에 대해 토론할 예정이다. 조은희 서울시 여성가족정책관은 “여성의 사회참여 증가로 맞벌이 부부 증가와 결혼연령의 고령화가 뚜렷한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맞는 맞춤형 저출산 정책개발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9-02
- 서울시 “결혼부터 육아까지 통합지원” 서울시가 저출산에 대한 해법 중 하나로 ‘결혼부터 육아까지 통합지원’하는 방안을 내놨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31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아이낳기 좋은세상’ 서울운동본부 출범식에서 저출산 대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겠다며 이처럼 밝혔다. 오 시장은 현재 아동 양육과 보육중심인 지원을 결혼에서 육아까지 통합지원하는 한편 셋째 자녀 이상에게만 지급하던 출산 인센티브를 둘째 자녀를 낳은 경우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선별적으로 지원하던 방식도 전체 시민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지원으로 전환할 방침이다. 서울시는 또 직장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지원하기 위한 ‘직장맘 뱅크’를 운영하는 한편 결혼·출산을 꺼리는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도 강구하기로 했다. ‘아이낳기 좋은세상’ 서울운동본부에는 서울시를 비롯해 서울시의회 한국경영자총협회 서울여성가족재단 등 33개 단체가 참여한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9-01
- 빚으로 투자했다면 무조건 환매 코스피지수가 1600을 오르내리면서 투자자들의 펀드환매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국내주식형펀드의 경우 대부분 플러스 수익률로 올라섰지만 거치식펀드를 들었거나 적립식펀드였더라도 금융위기 이후 불입을 그만뒀던 투자자들은 아직도 마이너스 수익률에서 헤매고 있다. 해외펀드 투자자는 더욱 심란하다. 지역에 따라서는 아직도 반토막인 펀드가 많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마이너스 수익률을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 세계경제의 더블딥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나마 국내주식형이라도 나아졌을 때 환매하고 다른 투자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적립식펀드일 경우에는 불입을 계속할 경우 수익률은 결국 회복된다는 입장이지만 여유자금이 아닌 경우에는 환매도 고려할 것을 권하고 있다. #1. 40대 직장인 B씨는 2007년 지인 소개로 주택마련자금 3000만원을 중국펀드에 거치했다. 그 중 일부는 은행 대출금이었다. 눈만 뜨면 5%씩 수익률이 오르던 펀드는 그 해 하반기 무렵 급락을 거듭해 -50% 이상 주저앉았다가 원금의 60%가량까지 회복했다. 더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빼야 할지 고민 중이다. #2. 30대 교사 A씨는 펀드 붐이었던 2007년 국내주식형펀드 2개와 브릭스펀드 1개에 가입해 매달 총 100만원씩 넣었다. 지난해들어 각 펀드들이 -40%대의 수익률을 보이자 12월부터 불입을 중단했다. 그 펀드들은 요즘 수익률이 -10%선까지 회복됐다. 지금이라도 환매를 해야 할지 아니면 적립을 다시 시작할지가 고민이다. 솔직히 마이너스 수익률을 계속 보고 있으면 견디기 힘든 심정이다. #3. 40대 자영업자 C씨는 전세가격이 더 싼 집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남은 2000만원을 거치식으로 해외펀드에 넣었다. 현재 수익률은 -30%. ‘기다리면 좋아지리라’는 생각으로 묻어두려 했지만 전세 만기가 다 됐고 집주인이 전세를 올렸다. 다른 데서 대출을 해야 할지 아니면 환매를 할지 혼란스럽다. 세제개편으로 소득세도 부과된다는데. ◆용처 정해진 자금은 환매 고려하라 = 자산관리 전문가들은 A씨처럼 은행 대출금으로 투자를 했거나 주택마련, 결혼 등 용처 및 기간이 정해진 경우에는 무조건 환매를 할 것을 권했다. 손실이 났을 경우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 우리투자증권의 김희 PB팀장은 “여유자금인 경우 적립식 투자 납입을 권하지만 A씨의 경우 빌린 돈이 있다면 부분 환매를 해서라도 먼저 갚는 게 좋다”고 지적했다. “대출금리는 확정적이고 더 오를 가능성도 높지만 펀드의 단기 수익률은 이를 넘어설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C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언제 플러스로 올라갈지 모를 펀드를 환매하지 않기 위해 대출까지 고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창수 하나은행 PB는 “꼭 필요한 전세자금으로 써야 하는데 대출까지 받아서 펀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면서 “시장상황은 나아지겠지만 기대만큼 빠르게 수익률이 올라갈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세자금이라면 환매할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펀드스트레스 지겹지만 대안도 딱히 없다 = 채무상환이 목적이 아닌 이상 무조건적 환매보다는 대안 투자처 확보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동백 산업은행 집합투자 총괄 팀장도 부분 환매를 통한 투자처 재분배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팀장은 “증시 향방이 불확실한 요즘에는 브릭스나 원자재처럼 변동성 높은 펀드는 부분 환매를 하는 것이 좋다”며 “삼성그룹주 펀드 같은 안정성 높은 자산 비중을 키울 것을 권한다”고 밝혔다. 김창수 PB는 “주가의 변동성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적립식을 하는 것”이라며 “B씨 같은 경우 다시 적립식펀드에 돈을 넣을까를 고민한다는 것을 보니 저축할 여력이 있다는 뜻이므로 적립식은 지금이라도 재개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다. 물론 기존 펀드에 둘 것이냐는 다른 문제다. 투자목적에 맞게 상품을 바꾸는 것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김 PB는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펀드가 싫다고 해서 환매하는 것은 안 된다”며 “투자 자산의 반 이하는 위험자산에 나머지는 안전자산으로 돌려두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해외펀드의 경우 세제개편으로 인한 소득세 과세 부담은 아직 크지 않다. 하나대투증권은 ‘9월 자산관리 가이드’에서 무조건 환매를 하기보다 해외 시장을 점검하고 원금회복 또는 투자 수익을 본 뒤 세금을 내는게 더 나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김형선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31
- [사람이 희망이다]“저 기차처럼 꿈을 향해 달려라” 여승무원에서 기관사까지 화려한 철도경력 대륙철도 진출 꿈 품은 러시아 철도 전문가 내일신문은 연중기획 ‘사람이 희망이다’를 연재하며 ‘사람’에게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하는 우리 이웃과 동료를 만나 그들이 일구어가는 희망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지면 만들기에 독자 여러분도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희망을 가꾸는 이웃과 동료를 소개해주세요. (문의 내일신문 자치행정팀 2287-2266) “우리 기차가 대륙을 달려 멀리 유럽까지 가는 날을 상상하면 절로 힘이 납니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만난 코레일연구원 박은경 연구원(사진·40)은 대륙진출의 꿈 얘기를 풀어놨다. 박 연구원은 철도 여승무원에서 기관사로, 차량검수원으로, 다시 대륙철도 진출의 꿈을 품은 러시아철도 전문가로 변신한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가지고 있다. ◆여승무원이 철도와의 첫 인연 = 그가 철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새마을호 여승무원으로 입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다. 그러다 철도 여승무원이 ‘여행을 직업으로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료돼 1994년 당시 철도청에 입사했다. 그렇게 3년. 그는 ‘새마을호 여승무원’이라는 색다른 직업에 만족하며 전국을 누볐다. 하지만 여승무원이란 직업은 그의 도전정신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했다.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꾸지람도 자극이 됐다. “아버지께서 ‘기차를 끌어도 시원찮은데 객차에서 서비스나 하고 있냐’고 마뜩찮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관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서비스업인 여승무원에 대한 직업적 편견은 없지만 결국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국내 첫 여성 기관사의 꿈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관사가 되고 싶었어요. 철도청에 입사하고 나서 생긴 새로운 꿈이었죠.” 그는 1997년 철도대학 운전과 입학을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한다. 그의 새로운 꿈은 ‘국내 최초의 여성 기관사’. 박씨는 그 해 함께 철도청에 근무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아쉽게도 ‘최초’를 향한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철도대 한 해 선배인 강은옥씨가 첫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이후 짧은 기관사 생활을 접고 2000년 차량검수분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여성이 일하기에는 쉽지 않은 분야다. 하지만 당시에는 남편과 아이를 생각해 한 곳에 머물면서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부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대학을 여러 차례 옮겨 다닌 것 말고도 여승무원, 기관사 등 근무시간이 불규칙하고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분야에서 일했다.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살아야 할 책임감이 그녀를 잠시 한 곳에 머물게 했다. ◆대륙 진출의 꿈을 가슴에 품다 = 하지만 안정된 생활도 잠시.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륙철도 진출의 꿈’이었다. 시흥차량사무소 시절 만난 시베리아교통대학 방문단이 계기가 됐다. 철도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남긴 “대륙을 꿈꾸라”는 말도 자극을 줬다. 그는 마침내 ‘러시아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큰 아이가 네 살이었다. 주변의 만류도 많았고, 현실적인 고민도 컸다. 하지만 대륙진출에 대한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철도 관련 러시아 최고 명문이라는 ‘러시아 철도대학’으로 떠났다. 그는 러시아 철도대학에서 ‘철도물류’ 분야 박사학위에 도전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나름의 사명도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5년을 보냈다. 남편은 한국에 남겨둔 채 네 살배기 어린 딸과 함께 떠난 유학길이 편했을 리 없다. 미리 배운 러시아어도 그리 유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러시아 유학생활 5년은 러시아 철도에 상당한 인맥을 쌓는 결과로 이어졌다. 딸을 돌봐주던 보모까지도 전 모스크바 철도대학 총장을 지낸 분의 딸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인간관계가 한국과 러시아 간 철도 교류에서 도움을 준다. ◆철도 아는 러시아어 통역인 = 지난달 180여명의 철도인들이 12박13일을 함께한 시베리아횡단철도 탐방에서 그의 진가가 발휘됐다. 우선 참가 인원이 많아 전세열차가 필요했지만 계약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일정이 촉박한 탓에 출국 하루 전에야 겨우 전세열차 계약이 이뤄졌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한국철도공사 허준영 사장과 러시아철도공사 야쿠닌 사장의 친분이 큰 도움이 됐다. 우선 양쪽 사장 사이에 ‘원만한 협조’ 약속이 있었던 터라 박씨는 러시아를 상대로 ‘큰 소리(?)’를 쳐가며 계약을 이끌었다. 마침 러시아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모스크바철도대학 동문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또한 러시아 일정 내내 다른 통역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전문 통역인들이 철도 용어를 몰라 내용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그녀의 진가가 돋보였다.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 이면에 철도지식과 러시아 철도조직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사례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나라는 물론 러시아 철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남편의 절대적 신뢰로 가능했던 꿈 = 그의 숱한 도전 앞에는 늘 현실의 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남편을 홀로 둔 채 어린 아이만 대리고 떠난 러시아 유학을 결정할 때가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고심하고 있을 때 남편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줬다. 같은 철도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해’였겠지만, 그래도 남편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의 꿈에 동참했다. 그의 남편은 현재 KTX 여객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가 러시아로 떠난 5년 동안 남편이 남들 숙직까지 대신 서 가며 억척스럽게 일했다더군요. 남편의 절대적인 신뢰 덕분에 지금도 제가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를 닮아서일까. 그녀의 큰 딸도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벌써 외국 유학길을 떠났다. 러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귀국한 탓에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내 꿈 때문에 딸아이가 고생하는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파요. 제가 대학만 대여섯 곳을 옮겨 다녔듯 제 딸 역시 아직 어리지만 자기 나름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그의 바람처럼 그의 딸 역시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 길’에 올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9-02
- [사람이 희망이다] 코레일연구원 박은경씨 “꿈을 향해 달려라, 저 기차처럼” 여성무원에서 기관사까지, 화려한 철도경력 대륙철도 진출 꿈 품은 러시아철도 전문가 “우리 기차가 대륙을 달려 멀리 유럽까지 가는 날을 상상하면 절로 힘이 납니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만난 코레일연구원 박은경 연구원은 긴 러시아 철로만큼이 대륙진출의 꿈 얘기를 풀어놨다. 철도 여승무원에서 기관사로, 차량검수원으로, 다시 대륙철도 진출의 꿈을 품은 러시아철도 전문가로. 그녀는 15년 철도 인생에서 누구도 따라 하기 힘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또한 아직도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는 러시아철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누가 들어도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이력 뒤에는 언제나 꿈을 이루기 위해 주저 않고 달려들었던 그녀만의 ‘열정’이 숨어있다. ◆ 여승무원이 철도와의 첫 인연 = 그녀가 철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94년. 새마을호 여승무원으로 입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그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다. 그러다 철도 ‘여행이 직업’인 여승무원에 매료돼 94년 당시 철도청에 입사했다. 그렇게 3년. 그녀는 ‘새마을호 여승무원’이라는 색다른 직업에 만족하며 전국을 누볐다. 하지만 ‘새로운 꿈을 위한 그녀의 도전정신’을 담아내기에는 여승무원은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꾸지람도 자극이 됐다. “아버지께서 ‘기차를 끌어도 시원찮은데 객차에서 서비스나 하고 있냐’고 마뜩찮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관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결국 그녀는 기관사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 국내 첫 여성 기관사의 꿈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관사가 되고 싶었어요. 철도청에 입사하고 나서 생신 새로운 꿈이었죠.” 결국 그는 97년 철도대학 운전과 입학을 결심하게 되고, 결심은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진다. 그의 새로운 꿈은 ‘국내 최초의 여성 기관사’. 박은경씨는 그 해 함께 철도청에 근무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2학년 때는 임신해 배가 부른 상태에서 학교를 다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첫 여성 기관사’의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아쉽게도 ‘최초’를 향한 그녀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철도대 한 해 선배인 강은옥씨가 첫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이다. 박은경씨는 이후 짧은 기관사 생활을 접고 2000년 차량검수분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여성이 일하기에는 쉽지 않은 분야다. 하지만 당시에는 남편과 아이를 생각해 한 곳에 머물면서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부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대학을 여러 차례 옮겨 다닌 것 말고도 여승무원, 기관사 등 근무시간이 불규칙하고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분야에서 일했다.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살아야 할 책임감이 그녀를 잠시 한 곳에 머물게 했다. ◆ 대륙 진출의 꿈을 가슴에 품다 = 하지만 안정된 생활도 잠시.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륙철도 진출의 꿈’이었다. 시흥차량사무소 시절 만난 시베리아교통대학 방문단이 계기가 됐다. 철도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남긴 “대륙을 꿈꾸라”는 말도 자극을 줬다. 그녀는 마침내 ‘러시아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큰 아이가 네 살이었다. 주변의 만류도 많았고, 현실적인 고민도 컸다. 주변에서는 ‘독하다’는 비난 아닌 비난도 들어야했다. 하지만 대륙진출에 대한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철도 관련 러시아 최고 명문이라는 ‘러시아 철도대학’으로 떠났다. ‘철도물류’ 분야 박사학위에 도전한 것. 당시로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았던 터라 새로운 분야에 대한 개척이라는 나름의 사명도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5년을 보냈다. 남편은 한국에 남겨둔 채 네 살배기 어린 딸과 함께 떠난 유학길이 편했을 리 없다. 미리 배운 러시아어도 그리 유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러시아 유학생활은 의도했건, 아니면 운이 좋았건 러시아 철도의 상당한 인맥을 얻었다. 딸을 돌봐주던 보모까지도 전 모스크바 철도대학 총장을 지낸 분의 딸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인간관계가 한국과 러시아 간 철도 교류에서 감초 역할을 하곤 한다. ◆ 철도 아는 러시아어 통역인 ‘박은경’ = 지난달 180여명의 철도인들이 12박13일을 함께한 시베리아횡단철도 탐방에서 그녀의 진가가 발휘됐다. 우선 참가 인원이 많아 전세열차가 필요했지만 계약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일정이 촉박한 탓에 출국 하루 전에야 겨우 전세열차 계약이 이뤄졌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한국철도공사 허준영 사장과 러시아철도공사 야쿠닌 사장의 친분이 큰 도움이 됐다. 우선 양쪽 사장 사이에 ‘원만한 협조’ 약속이 있었던 터라 박은경씨는 러시아를 상대로 ‘큰 소리(?)’를 쳐가며 계약을 이끌었다. 마침 러시아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모스크바철도대학 동문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또한 러시아 일정 내내 다른 통역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전문 통역인들이 철도 용어를 몰라 내용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그녀의 진가가 돋보였다.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 이면에 철도지식과 러시아 철도조직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사례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나라는 물론 러시아 철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 남편 절대적 신뢰로 가능했던 꿈 = 그녀의 숱한 도전 앞에는 늘 현실의 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나 그녀는 크게 주저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홀로 둔 채 어린 아이만 대리고 떠난 러시아 유학을 결정할 때는 결코 쉽지 않았다. 기간도 길었고 생활비나 학비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심하고 있을 때 남편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줬다. 같은 철도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해’였겠지만, 그래도 남편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녀의 꿈에 동참했다. 남편은 현재 KTX 여객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가 러시아로 떠난 5년 동안 남편이 남들 숙직까지 대신 서 가며 억척스럽게 일했다더군요. 남편의 절대적인 신뢰 덕분에 지금도 제가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를 닮아서일까. 그녀의 큰 딸도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벌써 외국 유학길을 떠났다. 러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귀국한 탓에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본인이 유학을 원했고, 이번에는 영어권인 아일랜드를 택했다. 2년 후 졸업하면 중학교는 다시 미국이나 캐나다로 보낼 생각이다. “엄마때문에 딸아이가 고생하는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다행히 외국 생활에 잘 적응해 줘 고맙죠. 제가 꿈을 위해 대학만 대여섯 곳을 옮겨 다녔듯 제 딸 역시 아직 어리지만 자기 나름의 꿈을 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녀의 바람처럼 그녀의 딸 역시 자신의 꿈을 위해 이미 자신만의 ‘꿈을 향한 도전’에 나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르쿠츠크=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9-02
- (어깨)“플러스는 도대체 언제...” 손실 났지만 환매 고민하는 투자자들 코스피지수가 1600을 오르내리면서 투자자들의 펀드환매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국내주식형펀드의 경우 대부분 플러스 수익률로 올라섰지만 거치식펀드를 들었거나 적립식펀드였더라도 금융위기 이후 불입을 그만뒀던 투자자들은 아직도 마이너스 수익률에서 헤매고 있다. 해외펀드 투자자는 더욱 심란하다. 지역에 따라서는 아직도 반토막인 펀드가 많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마이너스 수익률을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 세계경제의 더블딥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나마 국내주식형이라도 나아졌을 때 환매하고 다른 투자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적립식펀드일 경우에는 불입을 계속할 경우 수익률은 결국 회복된다는 입장이지만 여유자금이 아닌 경우에는 환매도 고려할 것을 권하고 있다.(편집자주처럼 넣을 것) #1. 40대 직장인 B씨는 2007년 지인 소개로 주택마련자금 3000만원을 중국펀드에 거치했다. 그 중 일부는 은행 대출금이었다. 눈만 뜨면 5%씩 수익률이 오르던 펀드는 그 해 하반기 무렵 급락을 거듭해 -50% 이상 주저앉았다가 원금의 60%가량까지 회복했다. 더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빼야 할지 고민 중이다. #2. 30대 교사 A씨는 펀드 붐이었던 2007년 국내주식형펀드 2개와 브릭스펀드 1개에 가입해 매달 총 100만원씩 넣었다. 지난해들어 각 펀드들이 -40%대의 수익률을 보이자 12월부터 불입을 중단했다. 그 펀드들은 요즘 수익률이 -10%선까지 회복됐다. 지금이라도 환매를 해야 할지 아니면 적립을 다시 시작할지가 고민이다. 솔직히 마이너스 수익률을 계속 보고 있으면 견디기 힘든 심정이다. #3. 40대 자영업자 C씨는 전세가격이 더 싼 집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남은 2000만원을 거치식으로 해외펀드에 넣었다. 현재 수익률은 -30%. ‘기다리면 좋아지리라’는 생각으로 묻어두려 했지만 전세 만기가 다 됐고 집주인이 전세를 올렸다. 다른 데서 대출을 해야 할지 아니면 환매를 할지 혼란스럽다. 세제개편으로 소득세도 부과된다는데. ◆빌린 돈으로 투자했다면 무조건 환매하라 = 자산관리 전문가들은 A씨처럼 은행 대출금으로 투자를 했거나 주택마련, 결혼 등 용처 및 기간이 정해진 경우에는 무조건 환매를 할 것을 권했다. 손실이 났을 경우라도 어쩔 수 없다는 것. 우리투자증권의 김희 PB팀장은 “여유자금인 경우 적립식 투자 납입을 권하지만 A씨의 경우 빌린 돈이 있다면 부분 환매를 해서라도 먼저 갚는 게 좋다”고 지적했다. “대출금리는 확정적이고 더 오를 가능성도 높지만 펀드의 단기 수익률은 이를 넘어설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C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언제 플러스로 올라갈지 모를 펀드를 환매하지 않기 위해 대출까지 고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창수 하나은행 PB는 "꼭 필요한 전세자금으로 써야 하는데 대출까지 받아서 펀드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면서 "시장상황은 나아지겠지만 기대만큼 빠르게 수익률이 올라갈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세자금이라면 환매할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펀드스트레스 지겹지만 대안도 딱히 없다 = 채무상환이 목적이 아닌 이상 무조건적 환매보다는 대안 투자처 확보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동백 산업은행 집합투자 총괄 팀장도 부분 환매를 통한 투자처 재분배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팀장은 “증시 향방이 불확실한 요즘에는 브릭스나 원자재처럼 변동성 높은 펀드는 부분 환매를 하는 것이 좋다”며 “삼성그룹주 펀드 같은 안정성 높은 자산 비중을 키울 것을 권한다”고 밝혔다. 김창수 PB는 “주가의 변동성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적립식을 하는 것”이라며 “B씨 같은 경우 다시 적립식펀드에 돈을 넣을까를 고민한다는 것을 보니 저축할 여력이 있다는 뜻이므로 적립식은 지금이라도 재개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다. 물론 기존 펀드에 둘 것이냐는 다른 문제다. 투자목적에 맞게 상품을 바꾸는 것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김 PB는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펀드가 싫다고 해서 환매하는 것은 안 된다“며 ”투자 자산의 반 이하는 위험자산에 나머지는 안전자산으로 돌려두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해외펀드의 경우 세제개편으로 인한 소득세 과세 부담은 아직 크지 않다. 하나대투증권은 ‘9월 자산관리 가이드’에서 관련 세법 개정으로 내년중 손실난 펀드의 회복분에 대한 소득세 과세 부담이 줄어들게 되는 만큼 무조건 환매를 하기보다 해외 시장을 점검하고 원금회복 또는 투자 수익을 본 뒤 세금을 내는게 더 나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며 국내외 해외펀드 투자 비중을 7대 3 정도로 권고했다. 김형선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31
- [신간]‘인권을 외치다’ 류은숙 지음 푸른숲/ 1만5천원 나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당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과연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조취를 취했는가. 인권침해는 현대 들어 매우 교묘해져서 “과연 내가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나”를 못느끼게 만든다. 세계사에서 인권사가 점하는 위치가 높아지면서 인권침해는 더욱 고난도의 활동력을 취하고 있다. 인권은 억누르려는 자가 있을 때 항상 고개를 든다. 똑같은 권리와 존엄을 인정한다면 인권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 하지만 세상 곳곳에는 억누르려는자와 이를 극복하려는 자들로 가득하다. 즉 인권이 숨쉬기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억압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생존력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에 의한 억압, 성에 의한 억압, 세대차에 의한 억압, 피부색에 의한 억압, 국가간 억압은 어떤 형태로든 이어질 것이다. 결국 인권은 인류의 마지막 해결과제로 남게 된다. 인권은 세계사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인권을 얻는 과정은 역사적 변화기를 낳았다.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가 그렇고, 파리 ‘코뮌 선언’이 그렇다. 미국의 ‘독립선언’과 ‘노예해방선언’은 또 어떤가. 모두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인권운동사였다. 그 중 인권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선언은 세계인권선언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를 형제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1948년 선포한 ‘세계인권선언’ 제1조다. 이 인권 선언이 탄생한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동안 모든 대륙과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 5000만 명에 이르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참상과 만행은 자국민을 억압하는 국가는 인류 모두의 인권을 위협할 수 있음을 깨우쳐줬다. 1945년 창설된 유엔의 ‘유엔헌장’은 일반적인 수준의 인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더욱이 모순되는 조항도 함께 담고 있다. 엘리너 루스벨트를 의장으로 한 유엔 인권위원회는 8개국으로 구성된 ‘기초위원회’에 초안 작성을 맡겼다. 1947년 1월부터 1948년 12월 사이 ‘세계 인권 선언’의 기초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도 굴곡은 많았다. 선언으로 할 것인가 조약으로 할 것인가는 놓고 논란도 벌어졌다. 인권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여성해방 선언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여성, 그중에서 흑인 여성. 이들은 세계사에서 항상 피해자였다. 노예 중의 노예, 흑인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1851년 소저너 트루스의 말은 아직도 현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경종을 울린다. “신이 만든 최초의 여성이 혼자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만큼 강했다면, 여성이 함께 세상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노예제라는 단어는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포괄한다. 아동매매 아동 성매매 아동 노동착취 등 아동을 이용하는 행위에서 부채를 빌미로 한 감금노동, 인신매매, 인간 장기매매, 성 매매 착취, 노예 형태의 결혼 등. 이처럼 세계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인권 문제는 빼 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다. 인권사 속에서 인류의 희망을 찾아왔고, 또 앞으로 계속 그럴 것이다. 인류는 앞으로도 인권의 발전을 꾀할 것이고, 그만큼 세계는 또 교묘한 억압 구조를 만들어 낼 것이다. 저자는 류은숙은 인권문제는 연구하고 활동해 왔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꾸준히 인권 관련 자료를 축적했다. 이 책 ‘인권을 외치다’ 이전에 ‘인권법’ ‘아이들에게도 권리가 있다’ 등을 썼다. 초등학교 교과서 ‘인권의 가치’를 쓰기도 했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8
- 명성운수 버스운전기사 최순동씨 고양시의 어느 버스정류장. 버스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한 학생이 “아저씨, 이 버스 OO까지 가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운전석에는 선그라스에, 정복을 입은 여자기사분이 앉아서 “학생, 이렇게 예쁜 아저씨 본 적 있어요?”라고 되묻는다. 순간 버스 안은 유쾌한 웃음바다가 된다. “누나, OO가요?”라고 묻는 학생에게는 “시력이 너무 좋으니 요금 내지 말라”는 특혜가 주어질지도 모른단다. 고양시에서 영등포로 나가는 버스노선에 이처럼 멋진 ‘我줌마’가 있다는 제보가 여러 채널을 통해 들려왔다. 어렵사리 약속을 잡아 만난 사람은 바로 명성운수 버스운전기사, 최순동(47)씨다. 자식들이 나를 지킨 것 “보시다시피 저는 예쁘지도 않고,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어요. 그저 먹고 살려고 열심히 운전하는 것 뿐이죠.” 처음 만나자마자 최순동씨는 자신이 인터뷰에 맞는 인물이 아니라고 꽤나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삶의 굽이굽이 이야기보따리와 버스기사로서 겪었던 일을 풀어놓으니, ‘我줌마’의 자부심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최씨는 올해로 9년째 운전을 하고 있다. 결혼 전 외국인 회사, 사무직 등 소위 말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며 도도하게(?) 살았는데, 아이가 생긴 후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다. 살기 흉흉했던 IMF 시절, 다시 아이를 둘러업고 직장을 구하러 나섰지만 최씨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라곤 녹즙배달, 신문배달, 우유배달, 파출부, 홍보지 돌리는 일 등이었다. “경력단절 여성에게는 말 그대로 돈도 안 되는 허드렛일 밖에 없더군요.” 결국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빌딩청소를 했는데, 청소 일보다 더 힘든 것은 ‘젊은 여자가 왜 저런 일을 해?’라는 따가운 시선이었다. 그래도 최씨는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이를 악 물고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는 버스에서 여자운전기사를 발견하고 ‘아~ 저거다’ 싶었다. 면허도 없던 그는 그 날로 ‘운전기사’를 목표로 잡고, 1종 면허를 따기 위해 우유배달, 신문배달, 녹즙배달을 하면서 운전연습을 했다. 그 당시 최씨는 “밤새 여기 저기 트럭을 긁고, 울며 불며 다녔다”고 회상한다. 그는 1년만에 대형면허를 취득하고 마을버스 회사에 취직을 했다. 첫 기름밥 세계는 너무나 열악했다. 5~6분 간격으로 배차를 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결국 신장에 이상이 생겨 병원신세까지 지고 말았다. 그 때도 최씨는 “내가 여기서 못 버티면 내 아이들이 죽는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말한다. “한강에 자살하려고 몇 번이나 갔다가 돌아왔어요. 내가 아이들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며 살았지만, 실은 아이들이 저를 지킨 거예요. 지금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안전운전을 위해 더 긴장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은 군복무중이고 딸은 고3이다. 최씨 아줌마의 버스는 인심을 싣고~ 그는 마을버스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명성운수로 자리를 옮겨 큰 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행복한 직업이 또 있을까 싶어요. 큰 통유리를 통해 새벽의 장엄함부터 노을과 어둠이 깔리는 풍경을 매일 목격하잖아요. 가끔은 비도 퍼 붓고, 눈도 쏟아지고…. 어떤 영화보다도 멋있어요.” 그는 너무 힘든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사고만 안 나면 버스만큼 쉬운 일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마음으로 손님들을 맞으니 저절로 반가움이 앞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부모님 같고, 학생들은 자식같이 느껴진다. 그 친절함에 승객들이 인정으로 화답하는 것은 당연지사. 배추가 금값일 때, 농부 아저씨가 배추 3~4통을 들고 정류장에서 최씨의 버스를 무작정 기다렸다가 3일만에 만나 건네준 일도 있었다. 손 경례 인사를 잘 하는 최씨에게 시원한 주스를 꼬박꼬박 건네는 주차요원, 사과 2개를 꼭꼭 챙겨주는 과일노점상. 아침에 최씨의 차를 타고 밭일을 갔던 일단의 아줌마들이 저녁에 다시 그 차를 타고 인연이라며 한 보따리 주고 가는 시금치, “이거 졸릴 때 먹어~”하면서 입에 넣어주는 할머니들의 소중한 사탕…. 각박해진 세상에서 이런 인심을 만날 때면 빚 진 것 같고, 감사하고, 행복하단다. 너무 친절한 것도 병인지, 어떤 손님은 최씨를 보고 “운전도 부드럽고, 인사도 잘하는 걸 보니 초보인가 보다”고 넘겨짚기도 한다며 웃는다. 성별분업의 벽을 넘어~ 물론 힘든 일도 많았다. 취객이 행패를 부릴 때면 여성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같은 운전기사끼리도 동료로 대접하지 않고, 성적 대상이나 편협한 의미의 아줌마로 보는 시각도 불편하고 불쾌하다. 언젠가 영등포에서 정류장이 아닌 도로에 승객들이 몰려 내려와 있어, 최씨는 버스 문을 열지 않았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문을 열면 벌금이 20만원이다. 승객들은 차문을 발로 찼고, 버스에 오르며 갖은 욕을 했고, 요금을 던지기도 했다. “거의 집단폭력 수준이었죠. 온 몸이 떨렸지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여러분도 오늘 먹고 살려고 일했고, 나도 먹고 살려고 운전하고 있다. 내 차에 깔리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했어요. 헌데 아무도 안 나서대요? 그 날 그렇게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으면 아마 큰 사고가 났을지 몰라요. 조용히 ‘갑시다, 기사양반~’하는 소리에 분을 삭이고 운전을 했는데, 손님들이 내릴 때는 ‘수고하세요, 화내서 죄송해요’라는 인사들을 남기더군요.” 그는 아직도 남녀 평등한 문화나 높은 시민의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사실 강한 여자는 아니에요. 절박한 환경이 그렇게 단련시켰을 뿐이지요.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더라고요. 언덕을 오를 때 고개가 엄청 높아 보이지만, 고개를 넘고 나면 별 거 아니고,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여성들이 자신을 극복하면서 하고 싶은 어느 분야 어디든 진취적으로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남성중심 사업장인 운수회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멋장이 我줌마, 최순동씨가 인터뷰를 마치며 한 약속이다. “모든 고양시민들은 쾌적하고 안전하게 버스를 탈 권리가 있어요. 그 권리를 지켜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경화 리포터 71khjung@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9-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