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석 명절 때가 되면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습니다. 명절을 지낸 후에 카페에 ‘우리 집 명절 이야기’를 쓰라는 것입니다.
다수의 학생들은 명절 분위기가 점점 약해져 간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는 정말 재미있고 기다려졌는데, 지금은 그때 같지가 않다는 겁니다. 취업 준비 중인 사촌 형 누나도 안 오고, 가족들이 모였다가도 금방 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이가 어린 조카들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의 반응은 조금 달라집니다. 조카들은 숫자는 좀 줄었어도 자기네 어릴 적처럼 삼촌이나 형들을 만나서 재미있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똑 같은 현상도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거지요.
나는 한 가지 포인트를 더 주문합니다. 명절 때 가족들의 역할에 주목해 보라고 말합니다. 10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대학생들의 성 평등 의식이 훨씬 향상됐습니다. 남학생들이 결혼하면 아내의 부엌일을 적극 돕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여자 친구나 아내와 가사노동을 분담할 의사가 있다면 먼저 이번 명절부터 어머니나 형수를 도우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말리더라도 멈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결혼한 후에 아내와 부엌일을 함께 해도 어머니가 인정하시지만, 그렇지 않고 그때 가서 하면 아들이 달라졌다고 섭섭한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물론 어머니들도 이제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쑥쑥 줄어들고 있긴 합니다. 결혼을 하는 것만도 다행으로 받아들이고, 이혼하지 말고 잘 살기를 바라니까요.
본래 명절은 축제이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저기서 부담과 스트레스를 호소합니다. 금년에는 더위와 가뭄으로 과일과 야채 육류 등 농축산물이 비싸고 품질도 안 좋아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명절 증후군이 주부들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부터 청년들까지, 그리고 노인들까지 전 세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확장됐고, 의식주 문제와 생활의 편리함이 획기적으로 좋아졌는데, 왜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은 이렇게 계속 힘든 것일까요?
집집마다 열린 마음과 발상의 전환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비법들을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논산에 있는 명재 고택에 가보면 조선시대 기호유학의 대표였던 명재 윤증 선생이 제사와 차례 상을 간소화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가정마다 고수하는 전통문화도 자세히 보면 역동적으로 변화합니다. 주로 조부모 사후에 분위기가 일신되지요.
보다 적극적으로 가족들의 의견을 유연하게 수용하면 우리 집 명절 문화를 행복하게 키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명절에 그동안 생각해 온 한 가지 문제라도 풀고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멀리 타국에서 며느리를 데려 온 가정들이 많습니다. 며느리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신기해하며 애써서 배우는 동안 모든 가족들도 며느리 친정 나라 전통문화를 배우고 존중해주면 좋겠지요. 남녀가 평등해야 하듯 서로 다른 민족들도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한 세기 전까지도 자기네만 문화인이고 다른 모든 민족들은 미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만적인 것은 무기를 들고 침략한 자들이지, 자연 그대로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우리 아이들과 똑같이 잘 자라고 잘 살 수 있어야 우리사회는 건강한 사회인 거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인들이 못 마땅할 때가 많습니다. 명절 때마다 민심을 파악한다고 하는데요. 정말 그들이 마음 문을 열고 민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다음번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어떤 술책이 필요한지 꼼수 찾기에 골몰하지 않는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나처럼 이렇게 불신하면 안 좋은 일인데요. 그들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대통령과 여당이 정신 차리도록 확실하게 민심을 보여줬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정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바꿔가는 것도 정치인들에게 기대하기 보다는 우리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여론을 만들어가야 하지 싶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족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누구나 편하게 의견을 말하고 상호 소통하면서 좋은 대안을 찾아 가도록 열린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부부는 명절을 오붓하고 여유롭게 보냅니다만, 이렇게 명절 미담 만들기를 강조하고 보니 장가갈 나이가 된 아들이 잠시 들르면 부담 대신 편안함을 느끼도록 배려해야겠네요.
김의수(전북대 명예교수. 독일현대철학)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