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려면 시 정신이 필요해요. 대상과 사물의 의미를 바라보는 시인으로서의 눈과 정신이죠. 이론에 맞추지 않고 논리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자유. 시인 오직 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시 정신이고 시인의 감성이죠.”
시인이며 수필가인 지연희 작가에게 현대시 창작이론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전하려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오랜 세월 글을 쓰며 다듬어진 게 분명한 명료하고도 정갈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시가 좋아 만난 사람들
현대백화점 킨텍스점에서는 매주 화요일 아침 10시에 현대시 창작이론 수업이 열린다. 수강생은 20여 명으로 다른 문화센터에서 시작한 역사까지 합하면 벌써 15년 째 지연희 작가와 함께 시를 쓰고 있다.(문화센터 수업은 이 강좌처럼 동호인들이 모여 강좌 개설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 수업을 통해 등단한 작가만 해도 40여 명. 시인으로 등단하려는 꿈을 가진 이들부터 그저 시가 좋아 찾아온 사람까지 현대백화점 현대시 수업은 늘 북적북적하다.
수업은 현대시 감상으로 시작했다. 이날의 시는 류시화의 ‘어머니’였다. ‘시가 될 첫 음절, 첫 단어를/ 당신에게서 배웠다’로 시작하는 시 한 편을 분석하는 시간. 수강생들은 한 마디 한 마디 놓칠세라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에게서 시를 뺀다면 무생물 같은 존재들이죠. 어머니에게 모국어를 배우는 일은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강생들. 어느 학교의 어떤 학생들이 이렇게 열심히 문학을 공부할까. 아마도 이들은 학창시절에도 틀림없이 시를 사랑했을 것이다.
꿈이 있어 늙지 않는 문학 소년소녀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소녀였어요. 사회생활하고 결혼하면서(문학의 꿈을) 묻어 뒀죠. 교직에서 퇴직한 후 시를 시작해 올해 시집이 나와요. 소원 풀었죠. 수업을 못 나오고 집에 있어도 이 자리가 보여요. 시가 눈에 씌었죠. 행복해요.”
벌써 9년째 지연희 작가의 수업을 듣는 양수경씨의 말이다. 그는 “얼마 전 스승의 날에는 제자들이 찾아와 시를 쓰는 저를 보며 자랑스러워했다”며 소녀처럼 웃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가슴에만 품고 있던 시인의 꿈이었을까.
지연희 작가는 “사람들이 찾아와 시를 쓰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좋은 작품을 쓸 때 행복하다”고 했다. 또 “문학은 혼자 하는 게 맞지만 이런 그룹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도 좋다. 함께 하면서 새로운 의욕이 생겨난다”고 덧붙였다.
‘시’로 삶을 지탱할 힘을 얻다
시 공부가 만만치만은 않아 보였다. 이날 시를 써온 수강생들은 핵심을 관통하는 스승의 질문에 답하면서 자신의 한계와 맞닥뜨려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강생들은 이것이 지연희 작가 수업의 맛이라고 입을 모았다. 글을 쓰고 취해 있기가 얼마나 쉬운지. 그럴 때 눈 밝은 스승의 지적은 쓰지만 약이 되리라.
“시를 읽고 배우고 싶은 마음에 이번 학기에 처음 수업을 들었어요. 지연희 선생님은 콕콕 집어주시니 좋아요. (이 수업을 고른 건) 멋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새내기 수강생 이종호씨의 말이다.
활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문학이 설 자리를 잃은 역설. 하지만 현대시 창작이론 수강생들은 든든하다. 시가 곁에 있으니까.
저문 하루를 종이 위에 앉히다가
가만히 손바닥을 펴 본다.
분주했던 시간의 파편처럼 손금이
손바닥 가득 실금을 긋고 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내 삶의 조각들이 수놓아진 손바닥
어제는 무슨 일들이 모여 이 질곡의 금을 그려 놓았는지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이 내 삶의 끈을 연결하고 있는지
이 나이에도 나는 내 생의 고단을 내려놓지 못하고
안절부절 등에 지고 있다.
최소한 내 영혼이 육신에서 육탈되어
바람 다 빠진 고무풍선처럼
마음이 제 스스로 거죽만 남은 육신에서
주저앉을 때까지 지키려는 모양이다.
이 질긴 고뇌의 실금들
손바닥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는
가엾은 뫼비우스 띠의 흔적들
-지연희 시 ‘하루’ 전문
현대백화점 킨텍스점 현대시 창작이론 수강생들의 한마디
부성철씨- “지연희 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 수업은 깊이 음미하는 맛이 있어서 오히려 다른 시들이 심심해지기도 해요.”
박서양씨- “시를 창작하는 일은 낡아가는 내면을 리모델링하는 일이에요. 새롭고 아름답게 죽을 때까지 시를 쓸 거예요.”
한윤희씨- “시는 나에게 세상을 사는 깨달음을 주었죠. 시를 알게 돼 감사해요. 시를 쓰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싶어요.”
김수연씨- “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좋아요. 시를 사랑한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수업이랍니다.”
홍승애씨- “시를 쓰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요. 선생님은 송곳처럼 짚어주셔서 깜짝 놀랄 때가 있지만 역시 그래서 선생님이시죠.”
김용희씨- “그림을 먼저 시작했고 나중에 시를 배웠죠. 시를 접하게 돼서 삶이 아름다워졌어요.”
채재현씨- “시는 삶의 활력소예요. 시를 배우면서 사물을 볼 때 그냥 스쳐가지 않고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돼요.”
이영희씨- “시를 배우고 싶다고 하니 수필가인 친척이 지연희 교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를 쓰고 싶어요.”
미니인터뷰 시인·수필가 지연희
“어떤 시인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시인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요. 문학은 참다운 나를 발견하게 해주죠. 시 속에 쓰인 의미를 통해 참다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에요. 수필과 시를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지연희 작가는 1948년생으로 1982년 한국수필 ‘성명철학’을 추천받으며 등단했다. 2004년 소월문학상 본상, 2012년 대한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을 맡고 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 ‘남자는 오레오라고 쓴 과자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코드미디어)가 있다.
우리 지역 문화센터 시(詩) 수업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현대시 창작이론’ 031-822-4560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시 낭송반’ 031-909-2621~2
그랜드백화점 문화센터 ‘시 수필 창작의 실제’ 031-910-2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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