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을 누르니 “아이들로 시끄러울텐데요”하는 수줍음으로 안주인이 문을 열어 준다. 60이란 세월을 살아 낸 우리의 어머니이고 할머니의 모습이다. 손자 손녀들의 나란히 놓여 있는 신발들이 정겹다. 아빠 박종인(64) 엄마 김용숙(64) 큰 딸 박소현(35) 둘째 박소진(33) 셋째 박소림(31) 막내 아들 박성건(24). 4녀1남 참 다복한 모습의 가족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집에는 딸 셋 모두 출가했지만, 첫째와 셋째네 손자 손녀가 살고 있다. 귀염둥이 계윤성(41개월), 계윤우(28개월), 안예주(28개월)다.
1년 전 분당에서 장기동 청송마을로 이사를 왔다. 큰딸과 셋째도 엄마를 따라 감정동 실크벨리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의 안주인이자 엄마 그리고 할머니인 김씨는 솔직히 계획도시인 분당보다 김포는 대중교통과 편의시설이 불편하다고 털어놓는다.
남들처럼 그리고 남과 다르게
엄마 김씨는 64세의 나이만큼 정열을 키워왔다. 딸 셋 모두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첫째 딸은 피아노, 둘째와 셋째는 성악을 전공했다. 그리고 셋 모두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첫째는 부다페스트에서 어려운 학사제도에도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까지 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IMF가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둘째와 셋째를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둘째와 셋째도 돌아와서 공부를 마치고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했다. 한 달에 300∼400만원이 드는 분당의 사교육 열풍에 시킬 수도 안 시킬 수도 없어 조기유학을 권했다. 46살에 낳은 늦둥이에게 말이다. 16살에 아이가 선택한 나라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애정이 아닌 애착과 집착으로 막내를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막내는 월드컵 기간동안 영국 국가대표팀 통역원이 되었다. 월드컵 행사가 끝나면 군에 입대할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처럼 그렇게 자신을 잊고 사셨다. 88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4녀1남을 키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김씨는 다니던 사찰에서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했다. 병원이나 장애인 복지시설 교도소 군부대에 가서 기도와 노래로 위문방문을 해왔다. 주부로 대학입시를 시키는 10년이란 제일 바쁜 세월에 봉사활동으로 더욱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 김씨는 “봉사활동은 일상에서 여유 시간을 할애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으로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셋째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아마도 매일 바쁜 엄마가 딸들은 싫었나 보다.
김포가 준 기쁨, 딸이 준 보람
대중교통이 불편해 딸들이 아니면 꼼짝 않고 집에만 있던 김씨였다. 그런데 승가대학에 교양강좌가 있다는 소리에 교리강좌를 신청했다. 김포시내에 사원이 많지 않아 아쉬웠는데 서운함은 사라지고 버스 타는 법을 배워가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승가대의 교수진 강의를 직접 듣는 다는 것에 신도로서 행복했다. 전국에서 유일한 승가대학이 김포에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김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두진스님이 일반 신자들과 불교합창단을 발족했다. 바쁜 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고 선언하고 합창단에 가입했다. 환갑이 넘어 손자 손녀를 둔 나이에 불심을 노래한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처음 결성된 합창반에 반주는 두진스님이 했지만 음악을 지도해주고 지휘해 줄 선생님이 없었다. 노래를 할 수 있는 귀한 시간, 시어머니와 자식과 손자 손녀를 잊는 나를 위한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셋째 딸에게 합창단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셋째 박소림씨는 중창단에 소속되어 공연과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터라 엄마의 부탁에 달갑지 않았다. 물론 보식음(페이)도 많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가장 유일한 기쁨이 노래하는 것인데 합창단 전체를 위해 물러서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김포시 승가대학교 합창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
“셋째에게 고마워요. 유학도 중단에 포기하게 했는데, 너무도 예쁘게 잘 살아요. 어려운 곳에 가서 노래도 불러주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열심히 사는 것도요.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뒤를 이어 해주는 것이 고마워요”하고 김씨는 말한다.
“아니, 셋이나 키워요?”
놀이터에 윤성이와 윤우 예주를 데리고 나가면 듣는 인사다. 친구들도 하나같이 “너 그러다 골병들어 애들 키우지마”하고 일장 연설을 한다고 한다. “힘들 때도 있고 짜증 날 때도 있죠.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줘요”하고 이야기한다.
“옛날에 옛날에 엄마들이 그랬듯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나란 존재가 없었던 엄마들의 희생에 의해 나도 컸는데 나도 그래야 돼지요”하며 “시집 간 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 줄 거예요”한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금강경에 나오는 말인데요, 제 신앙 생활의 좌우명이에요. 내가 주었어도 베풀었어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거든요”
윤성이나 윤우가 엄마를 찾으면 “엄마는 대학교에 가서 대학생 누나 형들을 가르치지? 우리 엄마 최고지!” 이야기 해주고 예주가 엄마를 찾으면 “엄마는 아픈 사람들 위해서 ‘아’하고 노래 불러주지? 예주 엄마 최고지?”하며 손자 손녀들에게 설명을 해준단다. 할머니 이야기에 아직은 아기이지만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엄마가 없다고 외로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김씨에겐 행복이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했던가?
유진희 리포터 mafille7@hanmail.net
이 집에는 딸 셋 모두 출가했지만, 첫째와 셋째네 손자 손녀가 살고 있다. 귀염둥이 계윤성(41개월), 계윤우(28개월), 안예주(28개월)다.
1년 전 분당에서 장기동 청송마을로 이사를 왔다. 큰딸과 셋째도 엄마를 따라 감정동 실크벨리로 이사를 했다. 이 집의 안주인이자 엄마 그리고 할머니인 김씨는 솔직히 계획도시인 분당보다 김포는 대중교통과 편의시설이 불편하다고 털어놓는다.
남들처럼 그리고 남과 다르게
엄마 김씨는 64세의 나이만큼 정열을 키워왔다. 딸 셋 모두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첫째 딸은 피아노, 둘째와 셋째는 성악을 전공했다. 그리고 셋 모두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첫째는 부다페스트에서 어려운 학사제도에도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까지 하고 귀국했다. 하지만, IMF가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둘째와 셋째를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둘째와 셋째도 돌아와서 공부를 마치고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했다. 한 달에 300∼400만원이 드는 분당의 사교육 열풍에 시킬 수도 안 시킬 수도 없어 조기유학을 권했다. 46살에 낳은 늦둥이에게 말이다. 16살에 아이가 선택한 나라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애정이 아닌 애착과 집착으로 막내를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막내는 월드컵 기간동안 영국 국가대표팀 통역원이 되었다. 월드컵 행사가 끝나면 군에 입대할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처럼 그렇게 자신을 잊고 사셨다. 88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4녀1남을 키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김씨는 다니던 사찰에서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했다. 병원이나 장애인 복지시설 교도소 군부대에 가서 기도와 노래로 위문방문을 해왔다. 주부로 대학입시를 시키는 10년이란 제일 바쁜 세월에 봉사활동으로 더욱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 김씨는 “봉사활동은 일상에서 여유 시간을 할애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으로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셋째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아마도 매일 바쁜 엄마가 딸들은 싫었나 보다.
김포가 준 기쁨, 딸이 준 보람
대중교통이 불편해 딸들이 아니면 꼼짝 않고 집에만 있던 김씨였다. 그런데 승가대학에 교양강좌가 있다는 소리에 교리강좌를 신청했다. 김포시내에 사원이 많지 않아 아쉬웠는데 서운함은 사라지고 버스 타는 법을 배워가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승가대의 교수진 강의를 직접 듣는 다는 것에 신도로서 행복했다. 전국에서 유일한 승가대학이 김포에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김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두진스님이 일반 신자들과 불교합창단을 발족했다. 바쁜 딸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고 선언하고 합창단에 가입했다. 환갑이 넘어 손자 손녀를 둔 나이에 불심을 노래한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처음 결성된 합창반에 반주는 두진스님이 했지만 음악을 지도해주고 지휘해 줄 선생님이 없었다. 노래를 할 수 있는 귀한 시간, 시어머니와 자식과 손자 손녀를 잊는 나를 위한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셋째 딸에게 합창단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셋째 박소림씨는 중창단에 소속되어 공연과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터라 엄마의 부탁에 달갑지 않았다. 물론 보식음(페이)도 많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가장 유일한 기쁨이 노래하는 것인데 합창단 전체를 위해 물러서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김포시 승가대학교 합창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
“셋째에게 고마워요. 유학도 중단에 포기하게 했는데, 너무도 예쁘게 잘 살아요. 어려운 곳에 가서 노래도 불러주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열심히 사는 것도요.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뒤를 이어 해주는 것이 고마워요”하고 김씨는 말한다.
“아니, 셋이나 키워요?”
놀이터에 윤성이와 윤우 예주를 데리고 나가면 듣는 인사다. 친구들도 하나같이 “너 그러다 골병들어 애들 키우지마”하고 일장 연설을 한다고 한다. “힘들 때도 있고 짜증 날 때도 있죠.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행복하고 즐겁게 해줘요”하고 이야기한다.
“옛날에 옛날에 엄마들이 그랬듯이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나란 존재가 없었던 엄마들의 희생에 의해 나도 컸는데 나도 그래야 돼지요”하며 “시집 간 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 줄 거예요”한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고 금강경에 나오는 말인데요, 제 신앙 생활의 좌우명이에요. 내가 주었어도 베풀었어도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거든요”
윤성이나 윤우가 엄마를 찾으면 “엄마는 대학교에 가서 대학생 누나 형들을 가르치지? 우리 엄마 최고지!” 이야기 해주고 예주가 엄마를 찾으면 “엄마는 아픈 사람들 위해서 ‘아’하고 노래 불러주지? 예주 엄마 최고지?”하며 손자 손녀들에게 설명을 해준단다. 할머니 이야기에 아직은 아기이지만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엄마가 없다고 외로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김씨에겐 행복이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했던가?
유진희 리포터 mafille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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