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진단>시장이 거부한 하이닉스 매각(김기수 2002.05.02)

지역내일 2002-05-02
시장이 거부한 하이닉스 매각
김기수 금융팀장


하이닉스반도체 매각이 무산되면서 부실기업 처리에 급급한 김대중 정부가 관치경제를 계속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4월 30일 하이닉스반도체 이사회가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메모리부문을 매각하는 양해각서(MOU)를 거부함에 따라 하이닉스 매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사회 결정대로 독자생존하려면 반도체경기가 획기적으로 좋아져야 하고 막대한 연구개발(R&D)투자도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D램 국제시세가 급락세로 돌아섰고 정부와 채권단의 신규지원을 끌어내기는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하이닉스 매각이 경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대외신인도를 높일 것이라는 대의명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정부가 지방자체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하이닉스를 서둘러 매각하기 위해 무리수를 둬 일을 그르쳤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DJ정권 빅딜실패 덮기위한 관치협상의 실패
정부는 선거전에 대우자동차와 하이닉스를 매각해 부실기업처리를 매듭지으려 했다. 아울러 공적자금을 회수해 구조조정의 성과를 가시화 하려 했다. 정부는 오는 6월까지 보유 중인 조흥은행 지분 중 5억달러어치를 해외주식예탁증서(DR) 발행을 통해 매각할 계획이다. 또 우리금융지주를 6월말까지 상장, 주식매각대금으로 일부 공적자금을 회수할 예정이다. 불과 2개월내에 은행당 수천억원의 주식을 팔아야 할 상황이라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하이닉스 매각을 다시 서둘러 추진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동안 정부는 하이닉스 매각에 소극적인 주요 은행장을 경질하고 다른 은행장을 내세워 매각작업을 서둘렀다. 그 결과 마이크론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정부의 협상종용으로 채권단은 마이크론 주식 가격을 35달러로 책정했고 대신 15억달러를 추가 대출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4월 29일 정부는 채권단회의를 통해 정부 입장에 반대하는 곳은 팔목을 비틀고 모종의 거래를 통해 동의를 이끌어 냈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지난달 26일 투신권 사장단 면담에 이어 29일 오전 은행장회의에 참석, 동의안 설득에 나서는 등 관치협상을 주도했다. 이 위원장은 평소 기자들이 하이닉스 매각에 대해 물어오면 “채권단이 알아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국민여론에 연막을 치는 발언이었다.
하이닉스는 99년 정부의 무리한 빅딜(재벌간 대규모 사업교환)로 탄생했다. 현대전자에 우량기업 LG반도체를 합병한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 경기를 제대로 전망하지 못한 가운데 과잉투자를 빙자한 합병과 외국컨설팅사의 의견을 기초로한 주객이 전도된 무리한 합병, 이질적인 기업문화 등으로 실패는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빅딜정책 실패로 시작된 하이닉스 문제를 DJ임기 내에 마무리짓기 위해 매각 작업까지 무리수를 둔 것이다.
하이닉스 매각 실패는 결혼을 잘못시킨 부모가 딸을 강제로 이혼시킨 후 외국인에게 엄청난 지참금을 주면서까지 재혼시키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우습게보았던 사위(하이닉스 이사회)가 도장을 찍지 않고 이혼서류를 휴지통에 던져 버린 셈이다.
하이닉스 매각 무산은 금융당국이 주도한 관치협상이 시장에서 거부됐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관치경제 거부 조짐은 얼마전 조흥은행과 외환은행장 선임에서 나타났다. 두 은행 행장 선임 과정에서 관치, 혹은 낙하산 인사 시도 등 해묵은 논란이 재현됐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여론의 거센 반발 때문에 재경부나 금감원 출신이 행장에 선임되지 못했다. 능력 여부를 떠나 재경부나 감독원 출신이 무조건 거부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뒤로하고 관치인사와 이를 반대하는 시장의 힘겨루기에서 시장이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시장 인정 자율성 존중할 때 합리적 처리 가능
최근 상황은 관치와 시장의 힘이 밀고 밀리면서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는 과도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권말기 권력누수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대적 추세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하이닉스 이사회의 ‘매각 MOU 승인 부결’ 소식이 전해지자 이 금감위원장은 뒤늦게 ‘시장원리에 따른 처리’를 강조하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했다. 전날밤 잠을 두 시간밖에 못자고 이사회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운 이 위원장에게 ‘부결’ 소식은 상상할 수 없는 쓴 잔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감위원장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시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채권단과 이사회의 자율성을 존중할 때 ‘시장원리에 따른 하이닉스 처리’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김기수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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