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과 기쁨 뒤섞인 채 밤잠 설쳐

지역내일 2002-04-29
/금강산=공동취재단

“애비 노릇 못한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해다오.”, “형님, 오빠… 이 얼마 만이요.”
28일밤 금강산은 혼돈 그 자체였다. 남북 가족들은 강요당한 분단의 역사에 대한 원망과 반세기만의 만남이 던져준 기쁨이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한채 밤잠을 설쳤다.
남측 가족들은 자정을 넘겨 숙소인 해금강호텔로 돌아온 후에도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일부는 호텔로비를 서성이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객실에 올라간 가족들도 장전항을 바라보며 꿈만 같았던 하루를 돌이켰다.
가족들은 바쁜 일정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지만 가슴에 묻어둔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헤친 듯 사뭇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단체상봉 2시간, 만찬 2시간 등 4시간여의 만남이 50년 이산의 고통과 겹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람처럼 달리던 청년 남편이 백발 노인이 되오 나타나다니, 기다림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50년간 수절한 끝에 북쪽 남편 임한언(74)씨를 만난 정귀업(75)씨는 인생무상을 절감했다. “결혼했다”면서 “홀로 고생했다”고 미안해하던 남편이 영 딴 사람으로 다가왔다. 정 할머니는 그러나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질긴 부부의 인연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때 남기고 온 세 살박이 딸 필순(55)씨를 만난 오정동(81)씨는 주금이 잡힌 늙은 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무리 과거를 추수리려해도 믿어지지 않아 다리를 꼬집어보기도 했다. 오씨는 “제 어미를 꼭 닮았다”는 말을 해줬지만, 아버지를 원망하는 듯한 딸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헤아리기도 힘든 긴 세월이었지만 남북 가족들은 피붙이를 한 눈에 알아보고 눈물바다를 이뤘던 첫날이었다. 이들의 뜨거운 만남에서는 남과 북도, 군사분계선도 없었다.
이날 밤 해금강 호텔 로비에서 애꿎은 담배만 태우던 한 남측 가족은 “빨리 통일 돼야지, 다시 합쳐야 살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회한과 기쁨의 짧은 밤을 보낸 남북 가족들은 29일 개별상봉을 통해 혈육의 정을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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