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동제당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신이란 지명은 행정상의 사용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이곳을 서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도 예안 현의 서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어릴 적에 친구가 있어 상급 학교에 진학을 위해 타지로 나돌기 전까지만 해도 꽤 갔었던 마실이다. 친구들과 팔을 벌려 느티나무 둘레를 재어 보기도 하고, 생각 없이 올라가 놀기도 하였던 그 나무가 천연기념물 275호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 서다.
표지판에는 수령이 600년이며, 높이가 약 32m, 둘레가 9.6m나 되는 노거수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정 사유는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이며, 특별한 전설이나 설화는 없으나 마을 사람들이 수호하는 나무로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는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었다.
안동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에는 용계동 은행나무, 길안의 소태나무, 임동의 굴참나무, 와룡의 뚝향나무는 이미 알았어도 정작 내가 살았던 녹전의 서촌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줄은 몰랐었다.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가까이 두고도 그 귀중함을 모르고 특별히 책에 올려졌다고 새삼스럽게 부산을 떠는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수백 년 전부터 그 소중함을 알고 수 백년을 모시고 있지 않았는가.
600년의 긴 세월을 한자리에 서서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알고 있는 이 나무는 동제당 신목(神木)으로 모셔지고 있다. 누가 600년전에 심었단 말인가 아니면 자연적으로 자란 것일까.
이 마을에는 영양 김씨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 후에 초계 변씨의 변청원(卞淸源·14C로 추정)이 영양김씨 신주지사(信州知事)를 지낸 김지노(金智老)의 사위가 되어 당시 지명으로 성성현(宣城縣) 마곡(磨谷·사신의 옛 지명)에 정착하게 된다. 변청원의 아버지 변계손(卞季孫)은 조선 태조 때 사간원 벼슬을 했던 것으로 보아 지방에서의 그 위세를 알 수 있게 한다. 아마 이 나무도 이때에 심었을 것이라고 마을의 어른들이 얘기를 한다.
지금은 영양김씨도 없고 초계변씨들도 없다. 다만 그 외손들이 변씨들의 산소를 돌보고 있을 뿐이다.
이 마을에 정착한 변씨들은 변계손에서 그의 손자 변효겸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하면서 번성한다. 그런데 증손 변효검(卞孝儉)은 딸 6형제를 낳고 아들이 없었다. 이 딸 6형제는 지방의 이름 있는 가문들의 자제를 맞아 결혼을 하게 된다. 동생 변효창(卞孝昌)도 딸 하나만 낳아 함양 박씨 가문의 박사희를 사위로 맞아들이게 되면서 변씨 가문은 외손들에 의해 가계가 이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외손들은 외조상 변씨 가문을 중심으로 서촌에 자리잡고 외조상들의 제사를 받드는 외손봉사를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외손들 가운데 일곱 분을 사신 칠현(七賢·司諫 卞季孫, 司直 金有庸, 倦翁 柳빈, 默齊 朴士熹, 芝嶺 尹寬, 訥薺 金生溟, 樂山 李完)으로 부르고 있다. 1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딸아들 구별 없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제사도 자녀들이 나누어 지내거나 돌아가며 지냈었다. 고려말에서 조선 전기까지 처향(妻鄕)과 외향(外鄕) 곧 처가 마을과 외가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처가나 외가에 가서 살다가 마침내 자기 성씨를 중심으로 동성마을을 형성하기도 하고 서촌 마을처럼 외손들이 외조상을 모시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
옛 지명을 따서 마곡서원을 짓고 외조상을 추모하는 큰제사를 모셨던 것이며, 아직도 남아 있는 위토, 학계 등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도 그 외손들은 가을 찬 서리가 내리고 나면 변계손을 비롯 여섯 위의 외조상 산소에 모여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동신은 바로 초계 변씨의 외손녀 허씨처녀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동신도 외손봉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외조상이 심었을 느티나무를 의지하고 수백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허씨 처녀의 마음이 서촌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다.
정월 대보름 동제에 올린 제물은 이들 모두에게 신령스런 명약이 된다. 그 중에 백설기를 먹는 사람들은 무병하며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제사 때 켰던 촛불은 자손의 생산과 번영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제관에게 미리 부탁하여 촛불을 얻어다가 기도를 드리면 분명 자식을 얻는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항상 동제관에게 촛불을 예약하고 사람들은 무언중에 차례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때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그것도 부정이 될까 서로 양보하여 싸우는 일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아마도 이 마을 사람들의 올바른 나무신앙이 가져다준 것이 아닐까한다.
이제 산업화에 밀려 농촌 인구는 감소되고 나이 드신 어르신네들만이 외손봉사를 이어오면서, 외조상이 심으신 느티나무를 지키고 계신다. 하지만 나무가 있어 좋고 전통이 있어 좋은 동네 서촌 마을은 오늘도 그 외손들이 전국 각지에서 느티나무의 은덕을 입고 번성하고 있다.
600년 전에 심은 이 느티나무는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은 물론 이곳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오늘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서촌 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서 무더위를 잊는다. 외지에서 돈 잘 버는 아들이 에어컨을 사 준다고 해도 마을 공동의 에어컨인 느티나무가 있어 사오지 못하게 했다는 마을 한 어른의 얘기는 그늘의 시원함을 실감케 한다.
지면에서 32m 상공까지 뻗은 나무는 햇볕을 차단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떤 이는 걸어서, 자전거, 경운기, 자가용을 이용하여 나무 그늘 아래 낮잠도 자고 이야기도 하고 장기 바둑을 두면서 무더운 여름날을 오히려 서늘하게 보내고 있다.
나무그늘 하나 없이 달아오른 시멘트 길을 걸어가는 도시인의 짜증을 모르고 사는 서촌의 사람들은 진정 느티나무의 은덕을 받고 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김호태 경일고 교사
사신이란 지명은 행정상의 사용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이곳을 서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도 예안 현의 서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어릴 적에 친구가 있어 상급 학교에 진학을 위해 타지로 나돌기 전까지만 해도 꽤 갔었던 마실이다. 친구들과 팔을 벌려 느티나무 둘레를 재어 보기도 하고, 생각 없이 올라가 놀기도 하였던 그 나무가 천연기념물 275호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 서다.
표지판에는 수령이 600년이며, 높이가 약 32m, 둘레가 9.6m나 되는 노거수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정 사유는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이며, 특별한 전설이나 설화는 없으나 마을 사람들이 수호하는 나무로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는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었다.
안동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에는 용계동 은행나무, 길안의 소태나무, 임동의 굴참나무, 와룡의 뚝향나무는 이미 알았어도 정작 내가 살았던 녹전의 서촌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줄은 몰랐었다.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가까이 두고도 그 귀중함을 모르고 특별히 책에 올려졌다고 새삼스럽게 부산을 떠는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수백 년 전부터 그 소중함을 알고 수 백년을 모시고 있지 않았는가.
600년의 긴 세월을 한자리에 서서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알고 있는 이 나무는 동제당 신목(神木)으로 모셔지고 있다. 누가 600년전에 심었단 말인가 아니면 자연적으로 자란 것일까.
이 마을에는 영양 김씨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 후에 초계 변씨의 변청원(卞淸源·14C로 추정)이 영양김씨 신주지사(信州知事)를 지낸 김지노(金智老)의 사위가 되어 당시 지명으로 성성현(宣城縣) 마곡(磨谷·사신의 옛 지명)에 정착하게 된다. 변청원의 아버지 변계손(卞季孫)은 조선 태조 때 사간원 벼슬을 했던 것으로 보아 지방에서의 그 위세를 알 수 있게 한다. 아마 이 나무도 이때에 심었을 것이라고 마을의 어른들이 얘기를 한다.
지금은 영양김씨도 없고 초계변씨들도 없다. 다만 그 외손들이 변씨들의 산소를 돌보고 있을 뿐이다.
이 마을에 정착한 변씨들은 변계손에서 그의 손자 변효겸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하면서 번성한다. 그런데 증손 변효검(卞孝儉)은 딸 6형제를 낳고 아들이 없었다. 이 딸 6형제는 지방의 이름 있는 가문들의 자제를 맞아 결혼을 하게 된다. 동생 변효창(卞孝昌)도 딸 하나만 낳아 함양 박씨 가문의 박사희를 사위로 맞아들이게 되면서 변씨 가문은 외손들에 의해 가계가 이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외손들은 외조상 변씨 가문을 중심으로 서촌에 자리잡고 외조상들의 제사를 받드는 외손봉사를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외손들 가운데 일곱 분을 사신 칠현(七賢·司諫 卞季孫, 司直 金有庸, 倦翁 柳빈, 默齊 朴士熹, 芝嶺 尹寬, 訥薺 金生溟, 樂山 李完)으로 부르고 있다. 1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딸아들 구별 없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제사도 자녀들이 나누어 지내거나 돌아가며 지냈었다. 고려말에서 조선 전기까지 처향(妻鄕)과 외향(外鄕) 곧 처가 마을과 외가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처가나 외가에 가서 살다가 마침내 자기 성씨를 중심으로 동성마을을 형성하기도 하고 서촌 마을처럼 외손들이 외조상을 모시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
옛 지명을 따서 마곡서원을 짓고 외조상을 추모하는 큰제사를 모셨던 것이며, 아직도 남아 있는 위토, 학계 등은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도 그 외손들은 가을 찬 서리가 내리고 나면 변계손을 비롯 여섯 위의 외조상 산소에 모여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 마을을 지키는 느티나무 동신은 바로 초계 변씨의 외손녀 허씨처녀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동신도 외손봉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외조상이 심었을 느티나무를 의지하고 수백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허씨 처녀의 마음이 서촌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다.
정월 대보름 동제에 올린 제물은 이들 모두에게 신령스런 명약이 된다. 그 중에 백설기를 먹는 사람들은 무병하며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동제사 때 켰던 촛불은 자손의 생산과 번영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자식이 없는 사람들은 제관에게 미리 부탁하여 촛불을 얻어다가 기도를 드리면 분명 자식을 얻는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항상 동제관에게 촛불을 예약하고 사람들은 무언중에 차례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때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그것도 부정이 될까 서로 양보하여 싸우는 일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아마도 이 마을 사람들의 올바른 나무신앙이 가져다준 것이 아닐까한다.
이제 산업화에 밀려 농촌 인구는 감소되고 나이 드신 어르신네들만이 외손봉사를 이어오면서, 외조상이 심으신 느티나무를 지키고 계신다. 하지만 나무가 있어 좋고 전통이 있어 좋은 동네 서촌 마을은 오늘도 그 외손들이 전국 각지에서 느티나무의 은덕을 입고 번성하고 있다.
600년 전에 심은 이 느티나무는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은 물론 이곳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오늘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서촌 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서 무더위를 잊는다. 외지에서 돈 잘 버는 아들이 에어컨을 사 준다고 해도 마을 공동의 에어컨인 느티나무가 있어 사오지 못하게 했다는 마을 한 어른의 얘기는 그늘의 시원함을 실감케 한다.
지면에서 32m 상공까지 뻗은 나무는 햇볕을 차단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떤 이는 걸어서, 자전거, 경운기, 자가용을 이용하여 나무 그늘 아래 낮잠도 자고 이야기도 하고 장기 바둑을 두면서 무더운 여름날을 오히려 서늘하게 보내고 있다.
나무그늘 하나 없이 달아오른 시멘트 길을 걸어가는 도시인의 짜증을 모르고 사는 서촌의 사람들은 진정 느티나무의 은덕을 받고 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김호태 경일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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