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 1번 출구로 들어서서 잠시 달리면 중세의 성처럼 독특한 외관의 건물을 만나게 된다. 왕의 얼굴과 독수리의 날개, 사자의 몸이 합쳐진 기이한 생물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세계는 어디로 간 것일까. 타임앤블레이드(Time & Blade) 박물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 간 듯 시간이 멈췄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약 280여 평의 박물관 내부에 가득 찬 시계와 칼들. 1층에는 거북이 등껍질로 케이스를 만든 파텍 필립, 프랑스와 독일의 시계마을에서 수집한 오메가와 피아제, 19세기 초반 스위스 블랑팡 8days 회중시계, 마링앙투아네트의 모습이 담긴 법랑회중시계 덮개, 1800년대 후반 스위스 필립 탁상시계 등 진귀한 기계식 시계들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2층은 십자군전쟁 시 이슬람군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명검 다마스쿠스칼, 징기스칸 병사들의 단검 등 해적 영화나 역사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700여 점의 칼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시계와 칼을 개인이 수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박물관을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바로 이 엄청난 컬렉션의 주인공, 타임앤블레이드박물관 이동진 관장이다.
-왜 컬렉션을 시작했냐고? 그냥 시계가 아름다웠으니까
그가 열아홉 살 때 가족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때 이동진 관장은 혼자 한국에 남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도자기 공장을 남겨두고 떠나는 게 맘에 걸려서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것은 공장 말고 또 있었다. 부친이 취미삼아 수집한 다양한 시계가 그것이다. 그는 심심할 때마다 시계를 분해해 톱니바퀴와 나사들을 분리해 놓고 다시 맞춰보곤 했다. 대학시절에도 그는 허리춤에 회중시계를 달고 다녔다. 별나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냥 기계식 시계가 좋았다.
본격적인 컬렉션은 1964년 큰누이가 일하던 샌프란시스코의 뮤지엄에서 빈티지 시계 2개를 구입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시계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 작동 원리를 하나씩 배워가면서 점점 더 시계에 매료됐다. 컬렉션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고, 그때부터 틈이 날 때마다 영국과 스위스, 미국을 돌며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기계식 회중시계와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독특한 탁상시계를 집중적으로 모았다.
그의 박물관을 둘러본 이들은 그의 대단한 수집품에 감탄하며 묻는다. 왜 컬렉션을 시작했냐고. “누군가 그랬죠. 산이 거기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고. 나도 시계가 있으니까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냥 시계가 아름다웠으니까.”
-세계 7대 불가사의 등 고대 유적지 돌며 역사와 문화 탐구
1964년부터 수집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컬렉션을 시작한 지 48년째다. 1912년에 침몰한 타이타닉 호에서 나온 것과 같은 종류의 회중시계, 로마 병사의 투구를 본 뜬 탁상시계, 19세기 영국 대표 천문시계 등 그동안 그가 수집한 시계가 1300여종에 이른다. 종류도 그렇지만 이렇데 다양한 브랜드의 시계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의 시계박물관이 있긴 하지만 한 브랜드의 시계를 시대별로 전시해 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시계나 칼을 하나 사려면 사실 엄청난 공부를 하면서 그 물건이 정말 가치가 있는지 수백 번 생각해야 한다. 타임앤블레이드 박물관이 수준 높은 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이동진 관장이 세계 7대불가사의 등 고대 유적지를 돌며 역사와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 프랑스의 구교에 대항하던 신교 칼뱅파 위그노 교도들이 스위스 쥐라 산맥을 넘어와 소규모로 시계를 수공예로 제작한 것이 기계식 시계의 출발입니다. 그 무렵에 제네바에서 바젤까지 이른바 워치밸리(watch valley)가 형성됐죠. 예거 르쿨트르(Jaeger Lecoultre)의 역사도 1559년 피에르 르쿨트르가 해발 1000m의 르상티에(Le Sentier) 마을에 정착하면서 시작됐어요.” 파텍 필립이나 오메가, 피아제 등 대표적인 스위스 시계 브랜드가 명품 시계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리포터에게 스위스 시계의 역사를 풀어놓는 이동진 관장. 그는 단순히 1000여 점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아닌, 시계와 칼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수집해온 전문가 이상의 안목을 지닌 컬렉터다.
-그를 매료시킨 또 하나의 유물, 칼
시계 못지않게 그를 매료된 것은 칼. 시계와 칼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특별한 연관성은 없어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기술력이 응집된 물건이 시계라면 칼은 인류의 삶과 역사를 바꾼 가장 강력한 도구죠.” 그는 젊은 시절, 파키스탄 모헨조다로와 이라크의 바빌론 유적지를 여행하며 강렬한 이슬람 문화 속 전쟁의 역사에 깊이 매료됐다. “인도, 파키스탄, 실크로드부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등을 여행하며 모든 위대한 권력은 칼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시대의 칼을 통해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2층에 전시된 1800년대 사우디 왕가의 칼과 은에 화려한 무늬를 새긴 예멘 귀족이 쓰던 칼, 코끼리 상아로 만든 인도의 칼 등 손잡이 부분의 다채로운 조각과 루비, 옥, 금 등의 세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칼은 지나간 시대의 영화와 위용을 담고 있다. 전투용 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죽에 날을 갈아 쓰는 면도칼, 아무리 써도 닳지 않는 요리용 세라믹칼 등 실생활에 쓰이는 칼부터 유목민을 위한 휴대용 젓가락 통이 달린 기능성 칼까지 1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의미가 담긴 칼은 바로 다마스쿠스 칼. “역사상 최고의 칼은 바로 이 다마스쿠스(Damascus) 칼입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은 이 칼로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차지했지요. 돌이켜보면 몽고나 페르시아 등 칼을 잘 만드는 민족들이 세계를 지배했어요.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칼 박물관에 와서 다양한 종류의 칼을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 공부가 저절로 될 거예요."
타임앤블레이드박물관은 헤이리 유일의 국가지정박물관이다. 세라믹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동진 관장이 굳이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박물관을 연 이유가 있다. “유럽의 시계 박물관에 가보면 아이들이 직접 금속을 두드리고 만지면서 시계의 원리를 익혀요. 이제 우리도 명품이라 불릴 만한 좋은 시계를 만드는 시도를 해볼 시기라고 봅니다. 젊은 사람들이 제 컬렉션을 통해 기술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 많은 걸 얻어갔으면 좋겠어요.” 지하에 칼 만드는 시연장 까지 갖춘 것도 이 때문이다. 타임앤박물관에서는 지난 해 ‘해설이 있는 기계식 시계 특별전’을 열어 주목을 끌었다. 이동진 관장은 앞으로도 청소년은 물론 일반인들을 위한 박물관 해설, 칼 만들기 시연과 시계를 만드는 동영상 해설 등 더 다양한 문화강좌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www. time-blade.com 관람문의 031-949-5875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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