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곡 시립도서관 근처에 열녀(烈女) 향랑(香娘)의 추모비가 있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으나 매년 향랑을 위한 제사가 치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지난 22일 형곡 근린공원 내 팔각정에서는 열녀 향랑 추모(追慕) 시제(時祭)가 치러졌다. 매년 음력 9월 6일 ‘형곡 열녀 향랑 추모회’(회장 김억성) 주관으로 형곡2동 형남중학교 부근의 향랑 묘역에서 열렸지만 올해는 우천 관계로 향랑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공원의 팔각정에서 회원 및 주민들의 참여 아래 장소를 옮겨 진행되었다.
불과 300년전의 안따까운 실화
향랑에 관한 사연은 전설이나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니라 불과 300여 년 전에 우리 땅에 실존했던 한 여성의 실화이다.
조선조 숙종28년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으로 투신한 박향랑, 당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봉건적 사회질서가 한 여성에게 가한 삶의 질곡을 느낄 수 있다.
열일곱의 나이로 네 살 아래의 임칠봉과 결혼한 향랑은 포악한 남편이 쫓아내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계모가 박대하여 숙부에게 의탁하였으나 숙부가 개가할 것을 권하자 불경이부(不敬二夫·두 사람의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의 논리를 내세워 다시 시집으로 가 애걸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향랑은 죽기를 결심하고 야은 길재선생의 사당과 지주중류비가 있는 오태동 앞산 아래 낙동강으로 투신하였다.
향랑이 죽기 전에 만난 나뭇꾼 처녀에게 자신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지어주고 같이 불렀다는 6행의 애절한 가사는 형곡도서관 근처의 향랑 추모비에도 기록되어있으며, 지금도 산유화곡에 실려 불리며 국문학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세간에 구전되던 향랑의 이야기는 선산부사 조구상에 의해 조정에 알려지고 숙종29년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이에 구미문화원 주관 하에 향랑의 묘비가 발견된 자리에 가묘를 만들어 복원사업을 해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아직 남아있는 또 다른 향랑의 모습
일부에서 호주제 폐지의 정당성이 논의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 향랑의 사연은 이미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나 다른 나라의 신화처럼 회자되고 있다. 추모시제를 지켜보던 주민 도경은(주부·형곡동)씨는 “조선시대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비슷한 사연을 안고 사시는 제 주변의 한 할머니가 떠오르네요. 저희 시댁의 가까운 친지 분 중에서도 시댁에서 소박맞고 친정 오빠 집에서 사시다가 남편이 죽은 후 다시 그 시댁으로 들어가 큰집조카를 입양해서 키우며 노년을 보내시는 할머니가 계세요”라며 향랑과 같은 사례는 결코 먼 옛날 얘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 옆에 계시던 김남이(78·형곡동)할머니도 “그 당시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게야. 지금은 살기 좋아졌지”라고 거들었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주변엔 향랑처럼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시대적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세뇌되어 살아온 세대들이 많이 실존해있다.
급변하는 현 세태 속에서 열녀 향랑의 추모시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시제를 보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되는 것은 변화의 과도기를 거치는 하나의 관문 통과 절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이진희 리포터 leejh2004‘hanmir.com
지난 22일 형곡 근린공원 내 팔각정에서는 열녀 향랑 추모(追慕) 시제(時祭)가 치러졌다. 매년 음력 9월 6일 ‘형곡 열녀 향랑 추모회’(회장 김억성) 주관으로 형곡2동 형남중학교 부근의 향랑 묘역에서 열렸지만 올해는 우천 관계로 향랑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공원의 팔각정에서 회원 및 주민들의 참여 아래 장소를 옮겨 진행되었다.
불과 300년전의 안따까운 실화
향랑에 관한 사연은 전설이나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니라 불과 300여 년 전에 우리 땅에 실존했던 한 여성의 실화이다.
조선조 숙종28년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으로 투신한 박향랑, 당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봉건적 사회질서가 한 여성에게 가한 삶의 질곡을 느낄 수 있다.
열일곱의 나이로 네 살 아래의 임칠봉과 결혼한 향랑은 포악한 남편이 쫓아내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계모가 박대하여 숙부에게 의탁하였으나 숙부가 개가할 것을 권하자 불경이부(不敬二夫·두 사람의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의 논리를 내세워 다시 시집으로 가 애걸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향랑은 죽기를 결심하고 야은 길재선생의 사당과 지주중류비가 있는 오태동 앞산 아래 낙동강으로 투신하였다.
향랑이 죽기 전에 만난 나뭇꾼 처녀에게 자신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지어주고 같이 불렀다는 6행의 애절한 가사는 형곡도서관 근처의 향랑 추모비에도 기록되어있으며, 지금도 산유화곡에 실려 불리며 국문학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세간에 구전되던 향랑의 이야기는 선산부사 조구상에 의해 조정에 알려지고 숙종29년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이에 구미문화원 주관 하에 향랑의 묘비가 발견된 자리에 가묘를 만들어 복원사업을 해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아직 남아있는 또 다른 향랑의 모습
일부에서 호주제 폐지의 정당성이 논의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 향랑의 사연은 이미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나 다른 나라의 신화처럼 회자되고 있다. 추모시제를 지켜보던 주민 도경은(주부·형곡동)씨는 “조선시대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비슷한 사연을 안고 사시는 제 주변의 한 할머니가 떠오르네요. 저희 시댁의 가까운 친지 분 중에서도 시댁에서 소박맞고 친정 오빠 집에서 사시다가 남편이 죽은 후 다시 그 시댁으로 들어가 큰집조카를 입양해서 키우며 노년을 보내시는 할머니가 계세요”라며 향랑과 같은 사례는 결코 먼 옛날 얘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 옆에 계시던 김남이(78·형곡동)할머니도 “그 당시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게야. 지금은 살기 좋아졌지”라고 거들었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주변엔 향랑처럼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시대적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세뇌되어 살아온 세대들이 많이 실존해있다.
급변하는 현 세태 속에서 열녀 향랑의 추모시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시제를 보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되는 것은 변화의 과도기를 거치는 하나의 관문 통과 절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이진희 리포터 leejh2004‘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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