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은행은 잇따른 금리인하와 GDP(국내총생산) 발표, IMF(국제통화기금) 차입금 조기상환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재정경제부 등 다른 경제정책기관에 비해 한국은행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50년 역사를 갖고 있는 중앙은행이지만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년에 불과해 아직까지 통화정책기관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독권한이 없어지면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숱하게 받아왔다. 그러나 많은 비판 속에서도 중앙은행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일하는 직원이 대다수이다.
앞으로 한은은 미국 연방준비이사회(FRB)와 같은 위상과 역할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비판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번 주부터 ‘한국은행사람들’을 연재, 한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한은의 주요업무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는 한은의 발전을 바라는 쓴소리도 가감없이 담을 계획이다. 편집자 주
98년 9월. 전철환 총재가 부임한지 5개월 남짓 지났을 때였다. 정부는 한국은행에 경영위기를 겪고 있는 외환은행에 대해 대주주로서 출자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의 압력은 넉달넘게 계속됐고, 전 총재는 이규성 당시 재경부장관과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도 전 총재는 끝내 출자거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은행은 영리기업의 소유나 경영에 참여할 수 없다’는 한은법상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시중은행에 출자를 안하는 것이 새 한은법 취지에도 맞고, 잘못된 관행을 만들지 않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총재의 이런 뜻은 묻힌 채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몽니를 부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중앙은행이 시중은행 출자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에 어긋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변화는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전 총재의 고집(?) 덕분이다.
합리성 겸비한 원칙주의자
한은의 독립성확보와 위상강화는 전 총재가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 중 하나다. 통화정책을 정부의 간섭없이 운영해야 왜곡된 금융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다.
98년 3월 이후 정부의 계속되는 국공채 매입요구를 거절한 것도 과거 한은의 통화정책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고 전 총재가 현실을 도외시하고 원칙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구매자금대출제도가 그 대표적 예이다. 외환위기 이후 어음제도가 기업들 연쇄부도의 원인으로 지목돼 폐지논란이 한창일 때 전 총재는 대체 결제수단 없이 어음제도를 없애면 경제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 총재는 한은에서 수년간 연구를 거듭해 만든 구매자금대출제도를 시행했다. 현재 구매자금대출제도는 불과 1년 반 사이 기업어음의 50% 이상을 대체할 정도로 시장의 별다른 부작용 없이 보편화되고 있다.
전철환 총재 부임 이후 한은 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반 기업처럼 성과위주 직무평가제가 도입됐고, 인력도 30%나 줄었다. 새로 부임한 총재가 인력부터 줄이자고 나섰으니 직원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전 총재는 백정”이란 험한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온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을 중앙은행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
취임 후 3년 반이 지난 지금 전총재는 부하직원들에게 역대 한은 총재 중 ‘모시기에 제일 편한 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총재와 가장 가까운 비서실에서조차 총재가 화를 내는 경우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골프채 한번 잡아본 적이 없어
특히 공사가 분명해 공무가 아닌 일로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법도 없다. 이날까지 골프채 한번 잡아본 적도 없다. 특별한 공무가 없는 토요일 오후면 운전기사를 대기시켜놓지도 않는다.
“50년 한국은행 역사에서 그만큼 총재직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은행에 근무한 금융당국 고위간부는 전철환 총재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중앙은행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원칙주의자면서 서민들을 위한 금융정책을 펼 수 있는 마인드를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게 금융당국 간부의 설명이다.
사실 한국은행 총재직은 영예로운 자리임에는 틀림없지만 일상업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 총재는 특별한 회의가 없는 날이면 아침 8시 반에 출근, 하루 평균 2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읽고, 또 경제관련 자료들을 검토해 정책방향을 잡는 데 활용한다.
무미건조한 생활이지만 스스로도 “나에겐 딱 맞는 일”이라 할 정도로 그와 잘 어울리는 역할이다. 수십년간 교수생활이 몸에 밴 까닭이다.
전 총재는 ‘한은 총재로서 자신은 행복한 케이스’라 표현했다. 60∼70년대에는 경제기획원과 중화학공업단에서 공무원생활을 했고, 80∼90년대에는 교수로서 연구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두 경험이 총재직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직에서는 순발력을 요구하지만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기 힘듭니다. 반면 교직생활은 우리 경제의 발전방향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여긴 김지미씨 집이 아닙니다”
전 총재는 중앙은행 총재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다.
전 총재의 이런 소탈함에는 우리나라 서민이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대학(서울대 경제학과)을 다니면서 행정고시를 준비한 것도 ‘밥 먹고 살 직장’을 갖기 위해서였다. 50년대말은 요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실업이 심각하던 시절이었다.
전 총재는 행시에 합격하고도 행정병이 아닌 운전병으로 군대에 가게 돼 남들처럼 고생도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겨울철 석탄보급을 위해 꼬박 하루가 걸리는 태백지역까지 무거운 석탄을 일일이 옮길 때가 가장 힘들었다. 반면 시신을 운반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전 총재는 회상했다. 시신은 운전병이 직접 운반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충남대 교수시절 김지미 나훈아씨의 집을 구입, 팬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했던 것도 전 총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다. 서울에 계시던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장만한 이 집은 운 좋게도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김지미와 나훈아씨의 불화로 급매로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 밤 팬들이 찾아와 ‘나훈아 나와라’, ‘김지미 나와라’하는 통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손전등으로 집안의 책장 등을 비추며 “여긴 나훈아 김지미 집이 아니라 충남대 선생집입니다”라며 확인시켜 돌려보내기도 수차례. 그래도 귀가시 택시에 올라 “
김지미씨 집에 갑시다”고 외치면 집 앞에 딱 세워주곤 했던 일이 무척 재미있었다며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전 총재의 모습은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이다.
그러나 전 총재를 빛나게 하는 것은 소탈함 자체가 아니라 소탈함 속에 드러나는 선비정신이다.
얼마 전 그는 둘째 아들 결혼식을 직원들조차 모르게 치뤘다. 장남 결혼식도 마찬가지였다. 전 총재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우리나라 관혼상제를 개선해야한다고 생각해왔는 데 공직에 있다는 핑계로 시행했다”며 겸연쩍어 했다.
지난 8월 23일 전 총재는 IMF 차입금 중 마지막 남은 1억4000만달러를 상환하는 최종 ‘상환서류’에 결재했다. 당초 예정보다 2년 6개월이나 앞선 것이었지만 전 총재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경제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8월중 통화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전 총재는 “경제 예측을 정확하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국민들에게 거듭 사과의 뜻을 표했다.
“사람팔자보다도 맞추기 어려운 것이 경제예측인 것 같아요.”
사람팔자보다 맞추기 어려운 게 경제
한편에서는 IMF 조기졸업이 갖는 의미가 퇴색돼 아쉬움을 느끼는 게 전 총재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총재가 한은 총재로 부임한 98년 초반만 해도 외환위기의 여파로 금리가 20%대를 오르내리던 때였다.
“금리를 낮추고 싶어도 보유한 외환이 적으니 그럴 수도 없고… . 당시 실무자와 연락을 취하며 금리와 보유외환, 환율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금리를 낮추기 위해 노력했지요.”
총재 취임 후 3년 반만에 IMF조기졸업을 달성하고도 99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했으니 그의 감회가 새로울 만도 하다.
“최근 경기가 안 좋은 것도, 미국과 일본의 경기침체에서 비롯돼 중앙은행으로서 마땅한 정책을 수립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IMF를 극복한 국민인 만큼 희망을 버리지 말고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노력해달라는 게 전 총재의 당부다.
※ 약력
1938년 생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196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3~1976년 경제기획원, 중화학공업기획단
무임소장관실
1976~1998년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1983~1989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1998년~ 현재 한국은행 총재
그동안 재정경제부 등 다른 경제정책기관에 비해 한국은행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50년 역사를 갖고 있는 중앙은행이지만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년에 불과해 아직까지 통화정책기관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독권한이 없어지면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숱하게 받아왔다. 그러나 많은 비판 속에서도 중앙은행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일하는 직원이 대다수이다.
앞으로 한은은 미국 연방준비이사회(FRB)와 같은 위상과 역할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비판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번 주부터 ‘한국은행사람들’을 연재, 한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한은의 주요업무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는 한은의 발전을 바라는 쓴소리도 가감없이 담을 계획이다. 편집자 주
98년 9월. 전철환 총재가 부임한지 5개월 남짓 지났을 때였다. 정부는 한국은행에 경영위기를 겪고 있는 외환은행에 대해 대주주로서 출자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의 압력은 넉달넘게 계속됐고, 전 총재는 이규성 당시 재경부장관과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도 전 총재는 끝내 출자거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은행은 영리기업의 소유나 경영에 참여할 수 없다’는 한은법상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시중은행에 출자를 안하는 것이 새 한은법 취지에도 맞고, 잘못된 관행을 만들지 않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총재의 이런 뜻은 묻힌 채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몽니를 부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중앙은행이 시중은행 출자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에 어긋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변화는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전 총재의 고집(?) 덕분이다.
합리성 겸비한 원칙주의자
한은의 독립성확보와 위상강화는 전 총재가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 중 하나다. 통화정책을 정부의 간섭없이 운영해야 왜곡된 금융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다.
98년 3월 이후 정부의 계속되는 국공채 매입요구를 거절한 것도 과거 한은의 통화정책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고 전 총재가 현실을 도외시하고 원칙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구매자금대출제도가 그 대표적 예이다. 외환위기 이후 어음제도가 기업들 연쇄부도의 원인으로 지목돼 폐지논란이 한창일 때 전 총재는 대체 결제수단 없이 어음제도를 없애면 경제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 총재는 한은에서 수년간 연구를 거듭해 만든 구매자금대출제도를 시행했다. 현재 구매자금대출제도는 불과 1년 반 사이 기업어음의 50% 이상을 대체할 정도로 시장의 별다른 부작용 없이 보편화되고 있다.
전철환 총재 부임 이후 한은 내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반 기업처럼 성과위주 직무평가제가 도입됐고, 인력도 30%나 줄었다. 새로 부임한 총재가 인력부터 줄이자고 나섰으니 직원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전 총재는 백정”이란 험한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온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을 중앙은행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
취임 후 3년 반이 지난 지금 전총재는 부하직원들에게 역대 한은 총재 중 ‘모시기에 제일 편한 분’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총재와 가장 가까운 비서실에서조차 총재가 화를 내는 경우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골프채 한번 잡아본 적이 없어
특히 공사가 분명해 공무가 아닌 일로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법도 없다. 이날까지 골프채 한번 잡아본 적도 없다. 특별한 공무가 없는 토요일 오후면 운전기사를 대기시켜놓지도 않는다.
“50년 한국은행 역사에서 그만큼 총재직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은행에 근무한 금융당국 고위간부는 전철환 총재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중앙은행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원칙주의자면서 서민들을 위한 금융정책을 펼 수 있는 마인드를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게 금융당국 간부의 설명이다.
사실 한국은행 총재직은 영예로운 자리임에는 틀림없지만 일상업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 총재는 특별한 회의가 없는 날이면 아침 8시 반에 출근, 하루 평균 2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읽고, 또 경제관련 자료들을 검토해 정책방향을 잡는 데 활용한다.
무미건조한 생활이지만 스스로도 “나에겐 딱 맞는 일”이라 할 정도로 그와 잘 어울리는 역할이다. 수십년간 교수생활이 몸에 밴 까닭이다.
전 총재는 ‘한은 총재로서 자신은 행복한 케이스’라 표현했다. 60∼70년대에는 경제기획원과 중화학공업단에서 공무원생활을 했고, 80∼90년대에는 교수로서 연구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두 경험이 총재직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직에서는 순발력을 요구하지만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기 힘듭니다. 반면 교직생활은 우리 경제의 발전방향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여긴 김지미씨 집이 아닙니다”
전 총재는 중앙은행 총재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소탈한 성격이다.
전 총재의 이런 소탈함에는 우리나라 서민이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대학(서울대 경제학과)을 다니면서 행정고시를 준비한 것도 ‘밥 먹고 살 직장’을 갖기 위해서였다. 50년대말은 요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실업이 심각하던 시절이었다.
전 총재는 행시에 합격하고도 행정병이 아닌 운전병으로 군대에 가게 돼 남들처럼 고생도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겨울철 석탄보급을 위해 꼬박 하루가 걸리는 태백지역까지 무거운 석탄을 일일이 옮길 때가 가장 힘들었다. 반면 시신을 운반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전 총재는 회상했다. 시신은 운전병이 직접 운반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충남대 교수시절 김지미 나훈아씨의 집을 구입, 팬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했던 것도 전 총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다. 서울에 계시던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장만한 이 집은 운 좋게도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김지미와 나훈아씨의 불화로 급매로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 밤 팬들이 찾아와 ‘나훈아 나와라’, ‘김지미 나와라’하는 통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손전등으로 집안의 책장 등을 비추며 “여긴 나훈아 김지미 집이 아니라 충남대 선생집입니다”라며 확인시켜 돌려보내기도 수차례. 그래도 귀가시 택시에 올라 “
김지미씨 집에 갑시다”고 외치면 집 앞에 딱 세워주곤 했던 일이 무척 재미있었다며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전 총재의 모습은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이다.
그러나 전 총재를 빛나게 하는 것은 소탈함 자체가 아니라 소탈함 속에 드러나는 선비정신이다.
얼마 전 그는 둘째 아들 결혼식을 직원들조차 모르게 치뤘다. 장남 결혼식도 마찬가지였다. 전 총재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며 “우리나라 관혼상제를 개선해야한다고 생각해왔는 데 공직에 있다는 핑계로 시행했다”며 겸연쩍어 했다.
지난 8월 23일 전 총재는 IMF 차입금 중 마지막 남은 1억4000만달러를 상환하는 최종 ‘상환서류’에 결재했다. 당초 예정보다 2년 6개월이나 앞선 것이었지만 전 총재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경제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8월중 통화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전 총재는 “경제 예측을 정확하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국민들에게 거듭 사과의 뜻을 표했다.
“사람팔자보다도 맞추기 어려운 것이 경제예측인 것 같아요.”
사람팔자보다 맞추기 어려운 게 경제
한편에서는 IMF 조기졸업이 갖는 의미가 퇴색돼 아쉬움을 느끼는 게 전 총재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총재가 한은 총재로 부임한 98년 초반만 해도 외환위기의 여파로 금리가 20%대를 오르내리던 때였다.
“금리를 낮추고 싶어도 보유한 외환이 적으니 그럴 수도 없고… . 당시 실무자와 연락을 취하며 금리와 보유외환, 환율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금리를 낮추기 위해 노력했지요.”
총재 취임 후 3년 반만에 IMF조기졸업을 달성하고도 99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했으니 그의 감회가 새로울 만도 하다.
“최근 경기가 안 좋은 것도, 미국과 일본의 경기침체에서 비롯돼 중앙은행으로서 마땅한 정책을 수립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IMF를 극복한 국민인 만큼 희망을 버리지 말고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노력해달라는 게 전 총재의 당부다.
※ 약력
1938년 생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196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3~1976년 경제기획원, 중화학공업기획단
무임소장관실
1976~1998년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1983~1989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1998년~ 현재 한국은행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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