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10시30분, 김혜중 화백(50)의 민화 강의 및 조촐한 다과회가 일산구 탄현동 큰마을에서 열렸다.
고양시에 사는 일본인 주부 약 30명을 대상으로 열린 이날 강의는 한국민화회 대표로 우리나라 경복궁을 비롯, 외국의 문화원 특별전과 기념초대전 등 수회에 걸쳐 세계에 우리의 민화를 알리고 돌아온 김혜중 화백의 작품설명과 민화설명으로 두시간 가량 진행됐다.
민화는 서민들의 감수성을 공유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
'민화(民畵)'라는 이름부터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氏, 1889-1961)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을 정도로 민화는 철저하게 민중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졌으며 민중에 의해 유통된 그림이었다.
'한 사회에서 생활습속에 따라 제작된 대중적인 실용화'라고 정의되는 민화는 우리민족의 신앙 소원 일상생활과 정치 사회의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교화, 주거공간의 미적 장식, 민중의 미의식으로 직결되는 작품이다.
대부분 토착종교와 결합된 풍습에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들이 많고 무병장수 부귀공명 다산 벽사구복 등 서민의 삶에 대한 애착이 깃들어 '속화(俗畵)'로 불려지기도 했던 민화는 20세기 전후,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우리 국민들과 구미인, 일본인들에게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민화' '민족화' '겨레그림' 등으로 그 작품성이 인정받게 된다.
의미있는 노년을 위해 서른 다섯에 시작한 그림공부
김혜중 화백의 예술인생은 의미있는 노년으로 홀로서기 위해 시작됐다.
예술인인 남편 홍종진 교수(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 이수자, 이화여대 교수)와 만나 호된 결혼생활을 하기까지 김 화백의 인생은 우리나라 여성이면 당연히 해나가야 할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중 한순간 시어머니의 삶에서 자신의 노년을 걱정하게 되어 무조건 일을 찾았다.
남편의 영향으로 우리문화에 익숙하던 그가 그저 보고 그대로 그릴 수 있는 쉬운 그림이 민화였기에 민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서른 다섯을 전후해 새로 시작한 예술가로서의 인생은 힘겹게 쌓아올렸던 결혼생활에 비하면 그래도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시간 여유 없이 작품전을 준비하느라 끼니를 거르며 밤을 새우거나 역사에 근거해 오차 없는 기록화를 그릴 때, 전시회와 집안의 중요한 일이 겹치곤 할 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는 그는 "작년 미국전시회를 앞둔 어느 날 25년을 앓던 동생이 세상을 떴지요. 일은 눈앞에 쌓여있는데 슬픔을 참아야 하는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며 "겨우 전시회를 정리하고 뒷정리를 남편에게 맡긴 채 일찍 돌아와 슬픔을 삭이려는데 또다시 다른 곳에서 전시회 요청이 들어와 끝내 제대로 슬픔을 달래지도 못하고 동생을 보내야 했다"고 말끝을 흐렸다.
집안 곳곳마다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고2, 고3을 둔 두 아들의 뒷바라지와 집안살림은 물론, 베란다엔 포도열매가 송송 열린 포도나무와 빨갛게 익은 토마토, 서양란 화분이 그의 부지런함을 드러내 준다.
올해 78세의 나이로 모시와 베를 예쁘게 모아 쪽보자기를 만든 어머니의 바느질솜씨 또한 예술이기 때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토종 꽃씨를 받아 심고 가꾸는 근면함은 당연 김 화백보다 한수 위인 듯하다.
하세가와 에미(長谷川惠美, 37)씨는 "한국의 민화가 이렇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자세히 알게 돼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쪽보자기를 만든 바느질 솜씨에 경탄하기도 했다.
강의준비를 위해 하루 꼬박 걸려 부채에 십장생도와 화조도를 그린 작품을 직접 보여주었고
색깔고운 오미자차와 여러 가지 떡을 준비해 내놓는 완벽함 또한 그가 인생에 임하는 남다른 자세라 해석됐다.
그가 15년간 그린 민화는 수없이 다양하다.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능을 찾아 수원으로 가는 모습을 여덟폭 병풍에 그린 <정조대왕 능행도="">를 비롯해 64마리의 호랑이를 통해 한국인의 표정을 담은 <한국 호랑이="">, 신령한 구름 속에 싸여 꿈틀거리고 있는 <운룡도>, 우리나라 십장생의 모습을 모두 담은 <십장생도>와 <군학장생도>, 그리고 안방치장 목적과 부부의 화합을 기원하는 <화조영모도> 등 처음엔 있는 그대로 모방화를 그렸으나 점차 그 뜻과 용도를 적용해 그림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민화가 우리의 삶을 의미하며 삶 속에서 행복을 기원하는 그림이듯이 김 화백은 선뜻 그의 삶에서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인생으로의 출발을 시도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예술가의 경지를 넘어 전세계에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끊임없는 새로운 전시회를 구상하고 있다.
이영란 리포터 dazzle77@naeil.com화조영모도>군학장생도>십장생도>운룡도>한국>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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