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블로거들 사이에 ‘왕레몬’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우병남(40)씨. 감각 있는 리폼 재주와 감성적인 소품 디자인으로 인터넷 카페의 인기스타였던 그가 이제는 정회원만 5만 명이 넘는 ‘왕레몬하우스’의 주인장이자, 가구디자이너, 그리고 중국을 오가는 당당한 사업가가 되었다. 아이 키우는 엄마로, 살림하는 아내로 10년을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그가 인생의 제2막을 이렇게 화려하게 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우아한 여자’ ‘럭셔리한 여자’라는 첫 느낌부터 이야기를 풀어갈수록 강하게 풍기는 我줌마의 포스까지! 마치 한 땀 한 땀 옷을 짓듯 오랜 시간 오늘을 준비해 온 듯하다. 여성들의 로망이 담겨있는 왕레몬하우스에서 외모만큼이나 매력적인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감각’을 잃지 않도록 지원해준 가족
예쁘고 끼 많았던 병남씨. 어려서부터 뭔가를 만들고 꾸미는 것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특히 초등학생 시절 교내 환경 꾸미기로 주위의 인정을 받으면서 그 후 8년 동안이나 환경미화부장을 도맡아 했을 정도다. 그런 그의 남다른 감각은 입시를 위해 6년 이상 배웠던 피아노를 포기하고 미술로 전향하는 과정에서도 돋보인다. 그 때가 고등학교 1학년. “피아노보다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소릴 들었어요. 순간 내가 더 잘하는 걸 해야겠다 싶었죠.(웃음)” 입시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도전이었지만, 결국 미대 공예과에 당당히 입학한다.
그런데 작품과 전시 활동을 통해 공예디자이너로 활약을 하는가 싶더니 23살의 병남씨, 이번에는 결혼을 선언하여 또 다시 주위를 놀라게 한다. 공예디자이너의 꿈은 접었지만, 남편 뒷바라지와 세 살 터울의 자매를 키우는 일도 보람 있었다. 그렇게 결혼 생활 10년이 흘렀을 무렵,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틈틈이 집안 구석구석을 리폼 하는 그의 재주를 눈여겨 본 남편이 그에게 일을 권한 것. “당시 남편이 주방용품 판매업을 하다가 제작까지 하게 됐어요. 남편 회사 주방용기 디자인을 제게 맡긴 거죠.” 서른넷에 시작한 주방용기 디자인이 익숙해질 무렵, 그는 용기를 내어 평소 관심 있던 소품 가게를 오픈한다.
“사실 주방용기 디자인이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하하하. 회사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남편은 그냥 수긍해주더라고요. 제가 남편에게 고마운 게 바로 이런 점이에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표현하며 살겠다는 제 신조를 지킬 수 있게 도와주거든요.”
탁월한 안목과 신뢰가 바탕 된 ‘왕레몬하우스’
“소품 가게를 하면서 제 안에 숨겨져 있던 디자인 감성이 마구 솟구쳤어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 카페 ‘레몬테라스’에서 와이퍼로거(wife+blogger)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 때 중국산임에도 고가(18만원)에 팔리는 철재 선반을 보고, 영감을 얻었죠. ‘아~ 특이한 소품을 저렴하게 만들면 돈이 되겠구나’ 싶었죠.”
그 후 바로 디자인에 돌입, 공장 섭외에 나섰다. 공장 측과 협의하기 전에 미리 물건을 제작해 봤다. 그래서 적정가에 계약 성공! 1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아온 그의 야무진 면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철재 3·4단 선반’을 출시하고, 중국산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100개 한정으로 첫 공구(공동구매)를 시작했다. 반응이 거의 폭발적이었다. “2005년 당시 공구라는 판매방식이 생소했을 때에요. 그런데도 상품 등록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과 구입문의가 쇄도했어요.”
하지만 순조로운 출발과 달리 문제가 터졌다. 공장에서 ‘철재 수공예품이라 납기일을 지키기 어렵다’고 연락이 온 것. “이미 선불로 돈을 받았고, 배송날짜까지 미리 공지한 터라 잘못하면 사기꾼이 되는 순간이었죠.” 그는 물건을 팔지 못하는 것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더 괴로웠다고 한다. 신뢰를 중요시하는 그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공장 사정으로 납기일을 지키기 어렵게 됐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힘을 내라’, ‘더 믿음이 간다’는 댓글이 올라왔다. 그렇게 고객과 실시간으로 대화가 가능한 인터넷 덕분에 첫 공구를 무사히 마친 병남씨. 이때의 경험은 그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선물했다.
고객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킨 덕에, 출시하는 제품마다 5만개 돌파라는 진귀한 기록을 남겼고 5년 이상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히트작이 나오면서 철재 소품을 목재로 전환하고, ‘컨츄리 쉐비 화이트’라는 콘셉트로 본격적인 가구 디자인을 시작, ‘왕레몬하우스’에 둥지를 틀게 된다.
그는 첫 번째 스테디셀러인 ‘갤러리 인터폰 박스’를 만들면서 하청 공장을 중국으로 옮겼다. 청도를 시작으로 현재는 압록강 옆 단동을 오가며 가구를 만들고 있다. “제품의 가격을 올리기보다 다리품을 팔아 단가를 낮춘다”는 그. 특히 9차, 10차 공구로 이어지는 리뷰상품을 첫 공구 때와 같은 가격, 같은 퀄리티로 만들기 위해 검수 검사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그에게서 깐깐한 30대 여심을 사로잡은 섬세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우연히 찾아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생소한 길도 마다하지 않으며 질주하는 그의 탁월한 안목과 감각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런 면이 있었기에 서른 중반에 가구 디자이너가 되고, 마흔에는 열정이 넘치는 사업가로 종횡무진 중국을 넘나들며 왕레몬하우스를 진두지휘하는 것이 아닐까.
꿈꾸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
여자가 좋아하는 가구, 여자가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우병남씨. 오늘도 그 꿈을 위해 입안에 단내가 날 정도로 공장을 돌아다니며 디자인 한 것을 가구로 만들어 내고 있다.
“여성지 한권에 여자들의 로망이 담겨 있다고 하죠? 외국 잡지에서 본 듯한 풍경을 우리 집에서도 연출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모든 여자들이 왕레몬하우스에서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평소 좋아했던 까사미아를 멘토 삼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답니다. 작은 공방에서 시작한 까사미아처럼 가구, 리모델링, 인테리어 컨설팅까지 생활 전반의 종합 인테리어 회사로 성장하는 꿈이요.”
이남숙 리포터 nabis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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