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꿈들은 한 순간 어떤 영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속의 한 장면, 위인전 속의 한 구절 등 짧지만 강렬하게 가슴에 필이 꽂히는 순간 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로 무용가로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용덕(47)씨. 그의 꿈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수원의 한 국악원에서 꼭두각시 춤을 보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순탄대로는 아니었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 때 주저앉았다면 지금 같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무용에 입문할 수 있었던 큰 힘은 어머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했던 꼭두각시 춤이 왜 그리 아름답게 보이던지 그 날 이후로 무용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고 웃는 이용덕씨.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그가 열 살 남짓하던 당시에는 무용을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용학원도 거의 없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자가 많이 배워봐야 소용 없다”고 생각하던 완고하고 보수적인 양반. 그런 아버지 몰래 그를 지원해 준 것은 어머니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무용을 할 수 있었고 대학 무용과에 입학했지만, 그 때까지 아버지는 대학도 다른 과로 진학한 줄 아셨다고.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무용을 하도록 지원해줬다 하면 집이 좀 사는가 보다 생각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는 이용덕씨. 물질적인 도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오빠의 도움도 받고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한 해 벌어 한 해 학교 다니고 또 휴학을 거듭하다보니 졸업도 남들보다 한참이나 늦었고 석사과정도 대학졸업 후 10년 만에야 끝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무용을 포기하지 않았던 힘은 부모님이었다. 어머니는 꿈을 꺾지 않도록 지켜준 정신적인 지주였고 장단과 시조를 즐기던 아버지는 비록 반대는 했지만 그에게 예인(藝人)의 기질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할수록 빠져드는 한국무용의 매력
“일반인들이 보는 것보다 한국무용은 참 어렵고 힘든 춤이에요. 테크닉에 집중되는 타 무용 장르에 비해 한국무용은 전통무용 살풀이, 승무, 민속무용, 궁중무용, 검무 등 너무나 다양해 30여 년 무용을 하면서도 부채, 장구, 북, 타악 등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죠.”
한국무용 중에서도 그가 매료된 것은 태평무. 가슴 속 깊이 박힌 내면의 것을 절제된 동작으로 풀어내는 살풀이에 비해 웅장하고 화려하고 우아한 태평무에 더 끌린단다. 지난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에 이어 2006년 전북무형문화재 제7-2호 정읍설장고를 이수한 그는 그동안 경희대 경인여대 강사, 고양시 무용협회 이사, 통일문화예술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10여 년째 세원고 연극부의 한국무용을 지도하고 있고 총신대학에서 실버무용 담당 교수로 재직하는 등 무용가로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주부로서의 역할, 최선을 다하려 노력
한 해에 수차례 지방과 해외 무대가 그를 기다리지만, 무대 밖에서는 그도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다. 자기 일을 가진 여성들이 대부분 일과 가정, 둘 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부분 포기하거나 타협한다고 하지만 이용덕씨는 무대 밖에서는 주부로서의 역할에 소홀하지 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고 토로한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다 남편도 예술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터라 “충실하려고 했던 것보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 맞다”는 그는 공연을 앞두고 새벽까지 연습해야 하는 상황을 남편이 이해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가 안 돼 서운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한다고 해도 많은 것이 부족했을 남편이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다고 한다.
이제 “무용을 하지 않으면 못 사는 여자”로 인정해주고 반 쯤 포기한 남편은 그렇지만, 고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는 무용보다 ‘엄마’로서의 역할이 우선. “엄마의 따스함을 충분히 느끼면서 크게 하고 싶다”는 그는 힘들지만 100%는 아니라도 최선을 다하는 며느리, 아내, 엄마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정말 좋아하는 일 할 수 있어 행복
한 때 부상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시간을 겪으면서 “물리적인 통증보다 무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아팠다”는 그는 오히려 무대에 서자 그 아픔이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무용을 사랑한다. 또 좋아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것,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단다. 더 행복한 것은 나이가 들면 은퇴하는 것이 보통인 다른 일에 비해 무용은 나이가 들수록 완숙미가 더해져 더 동작이 완벽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우아한 동작으로 후배들을 매료시키는 선배 무용가들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는 무용가 이용덕. 한국무용은 동작이 정적인 것이 많은데다 끊임없이 다음 동작을 외워야 하는 등 노년의 몸과 정신을 건강을 위해서 더 없이 좋다고 한다. 그가 실버무용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인과 주부들에게 실버무용을 전파해 바른 자세와 우울증을 떨치는 좋은 취미생활로 가꿔나가는데 초석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의 큰 꿈은 외국인들이 더 극찬하는 한국무용이 ‘태양의 서커스’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로 더 많은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것. 그의 춤사위는 부드럽지만 꿈을 향한 열정은 뜨겁고 강하기만 하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로 무용가로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용덕(47)씨. 그의 꿈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수원의 한 국악원에서 꼭두각시 춤을 보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순탄대로는 아니었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 때 주저앉았다면 지금 같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무용에 입문할 수 있었던 큰 힘은 어머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단순하고 유치(?)하기도 했던 꼭두각시 춤이 왜 그리 아름답게 보이던지 그 날 이후로 무용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고 웃는 이용덕씨.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그가 열 살 남짓하던 당시에는 무용을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용학원도 거의 없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자가 많이 배워봐야 소용 없다”고 생각하던 완고하고 보수적인 양반. 그런 아버지 몰래 그를 지원해 준 것은 어머니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무용을 할 수 있었고 대학 무용과에 입학했지만, 그 때까지 아버지는 대학도 다른 과로 진학한 줄 아셨다고.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무용을 하도록 지원해줬다 하면 집이 좀 사는가 보다 생각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는 이용덕씨. 물질적인 도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오빠의 도움도 받고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한 해 벌어 한 해 학교 다니고 또 휴학을 거듭하다보니 졸업도 남들보다 한참이나 늦었고 석사과정도 대학졸업 후 10년 만에야 끝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무용을 포기하지 않았던 힘은 부모님이었다. 어머니는 꿈을 꺾지 않도록 지켜준 정신적인 지주였고 장단과 시조를 즐기던 아버지는 비록 반대는 했지만 그에게 예인(藝人)의 기질을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할수록 빠져드는 한국무용의 매력
“일반인들이 보는 것보다 한국무용은 참 어렵고 힘든 춤이에요. 테크닉에 집중되는 타 무용 장르에 비해 한국무용은 전통무용 살풀이, 승무, 민속무용, 궁중무용, 검무 등 너무나 다양해 30여 년 무용을 하면서도 부채, 장구, 북, 타악 등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죠.”
한국무용 중에서도 그가 매료된 것은 태평무. 가슴 속 깊이 박힌 내면의 것을 절제된 동작으로 풀어내는 살풀이에 비해 웅장하고 화려하고 우아한 태평무에 더 끌린단다. 지난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에 이어 2006년 전북무형문화재 제7-2호 정읍설장고를 이수한 그는 그동안 경희대 경인여대 강사, 고양시 무용협회 이사, 통일문화예술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10여 년째 세원고 연극부의 한국무용을 지도하고 있고 총신대학에서 실버무용 담당 교수로 재직하는 등 무용가로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주부로서의 역할, 최선을 다하려 노력
한 해에 수차례 지방과 해외 무대가 그를 기다리지만, 무대 밖에서는 그도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다. 자기 일을 가진 여성들이 대부분 일과 가정, 둘 다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부분 포기하거나 타협한다고 하지만 이용덕씨는 무대 밖에서는 주부로서의 역할에 소홀하지 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고 토로한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다 남편도 예술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터라 “충실하려고 했던 것보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 맞다”는 그는 공연을 앞두고 새벽까지 연습해야 하는 상황을 남편이 이해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가 안 돼 서운하기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한다고 해도 많은 것이 부족했을 남편이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다고 한다.
이제 “무용을 하지 않으면 못 사는 여자”로 인정해주고 반 쯤 포기한 남편은 그렇지만, 고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는 무용보다 ‘엄마’로서의 역할이 우선. “엄마의 따스함을 충분히 느끼면서 크게 하고 싶다”는 그는 힘들지만 100%는 아니라도 최선을 다하는 며느리, 아내, 엄마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한다.
정말 좋아하는 일 할 수 있어 행복
한 때 부상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시간을 겪으면서 “물리적인 통증보다 무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아팠다”는 그는 오히려 무대에 서자 그 아픔이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너무나 무용을 사랑한다. 또 좋아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것,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단다. 더 행복한 것은 나이가 들면 은퇴하는 것이 보통인 다른 일에 비해 무용은 나이가 들수록 완숙미가 더해져 더 동작이 완벽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
팔십이 넘은 나이에도 우아한 동작으로 후배들을 매료시키는 선배 무용가들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는 무용가 이용덕. 한국무용은 동작이 정적인 것이 많은데다 끊임없이 다음 동작을 외워야 하는 등 노년의 몸과 정신을 건강을 위해서 더 없이 좋다고 한다. 그가 실버무용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인과 주부들에게 실버무용을 전파해 바른 자세와 우울증을 떨치는 좋은 취미생활로 가꿔나가는데 초석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의 큰 꿈은 외국인들이 더 극찬하는 한국무용이 ‘태양의 서커스’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로 더 많은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것. 그의 춤사위는 부드럽지만 꿈을 향한 열정은 뜨겁고 강하기만 하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