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과 미신에 벗어나지 못한 모습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봐
조선견문록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 지음
김 철 옮김 /이숲 출판사
가격 1만3000원
흐리고 바람이 불던 1888년 3월의 어느날. 미국 시카고 여자의과대학 출신인 릴리어스 호톤 양이 제물포 항구에 내린다. 그때 나이 서른일곱. 모험을 하기에 여자로선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의사겸 선교사로서 조선에 파견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 머나먼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합병된 뒤인 1921년 타계하기까지 마지막 반평생을 조선에서 지냈다. 그것으로도 인연이 모자랐는지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한국과의 인연을 따진다면 그녀의 가족이 대대로 한결같다. 이 땅에서 만나 배필로 맺어진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렇고, 아들 원한경과 손자인 원일한 요한 형제가 그렇다. 몇해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원한광 박사에 이르기까지 4대째 이어진 인연이다.
이처럼 그녀와 남편 언더우드가 조선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한 가운데서도 어려움으로 웃고 눈물짓던 초창기 15년 동안의 얘기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조선 견문록’이다. 크게 보면 의료선교 활동의 기록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외국인의 눈길로 그려낸 그때의 생활상은 지금 우리에게도 흥미롭다. 여자 특유의 세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바라봤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선교사들과 왕실과의 밀접했던 관계도 새롭게 소개된다. 이를테면, 이 책은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의 지침서인 셈이다.
당시 구한말의 한반도는 격동기였다. 일찌감치 식민 야욕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던 일본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의 군사적 책동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도 수시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 뿐이었다.
이러한 외세의 간섭이 아니라도 백성들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헐벗고 가난했다. 하루 세끼만 해결해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헐렁한 무명옷 한벌로 사시사철을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근대적인 관습과 미신에서도 벗어나지 못할 때였다.
저자는 이런 모습을 연민의 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바라본다. 조선 민족이 지저분하고 느려 터졌다는 당초의 생각이 점차 낙천적이며 태평스럽고 너그럽다는 식으로 바뀌어가는 것도 그런 과정에서였을 것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떠난 조선인들이 부지런하다는 사실까지 들어가며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외국인인 저자가 그럴 정도였다면 당사자인 우리 백성들의 애간장이야 과연 어떠했을까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조정은 무능했고 궁궐에 드나드는 간신배들은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며 제 안위만을 챙기기에 바빴다. 그것이 당시 조선의 운명이며, 한계였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만연했다. 과거시험에 합격하려면 미리 적당히 돈을 써야 했다. 조정에서 선교사들에게 끊어준 통행증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어느 고을의 원님도 아마 돈으로 벼슬을 샀을지 모를 일이다. 번져가는 콜레라 치료를 위해 조정이 비용을 지출했으나 여기저기서 빼내가는 바람에 방역활동에 애로를 겪었다는 게 저자의 경험담이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을사조약을 거쳐 헤이그 밀사사건 직전까지의 기간을 관통하고 있다. 본인이 역사의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서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다.
가장 눈길이 쏠리는 부분은 역시 왕실 내부의 돌아가던 상황이다. 그녀가 명성황후의 시의로 자주 알현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이니 만큼 사실성도 돋보인다. 명성황후의 개인적 인품은 물론 옆에서 관찰한 얼굴 표정과 머리 장식 등의 표현에서는 뛰어난 관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명성황후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통역이 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을미사변으로 황후가 일본 자객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을 때 누구보다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는지 모른다.
물론 개인적인 편견이 드러나는 부분도 전혀 없지는 않다. 대원군을 나쁘게만 표현했다거나,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의 처사가 당연하다는 투의 대목이 그런 사례다. 저자도 이미 사건의 이해관계 한켠에 들어 있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종교적인 신념과 가치를 떠나서도 매우 눈물겹게 다가온다. 의료 및 교육활동이 함께 어우러졌으니 한때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접했던 허균이나 대장금의 한 장면이 떠오를 정도다.
위생 불량으로 걸핏하면 돌림병이 나돌았다. 도랑은 온통 쓰레기에 막히고 구정물 구덩이엔 파리떼가 들끓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적 몇장을 문간에 붙이거나 푸닥거리로 때우는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던 때였다.
정식 교육을 받은 의사로서 그녀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어린 세딸을 둔 젊은 과부의 죽음을 눈물로 보냈으며, 아들을 묻고 나서 자신도 목숨을 끊은 어느 아버지의 애틋한 얘기도 소개되고 있다. 거의 죽다시피 한 환자를 며칠의 진료 끝에 살려내는 장면에서는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감동이 느껴진다.
언더우드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겸해 개성과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의 강계, 의주까지 선교활동에 따라나섰던 그녀의 담대함도 기억할 부분이다. 이들 부부가 그때의 여행에서 이미 휴대용 간이 침대와 고무 욕조를 갖고 다녔으며 여인숙에 들 때마다 사람들이 창호문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보았다는 얘기는 양념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에 대한 신변보장을 장담하기 어려운데다 산짐승이 우글거리고 산길도 험할 때였다. 주변의 만류 속에 떠난 신혼여행이었다. 실제로 도중에 산적떼를 만나 목숨이 위태로운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사실은 그녀의 생애가 이런 과정의 연속이나 다름없었다.
저자의 모험정신과 희생정신에서 굳이 의미를 찾자면 신앙과 교육, 문명의 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그런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얘기 자체가 워낙 재미있기 때문이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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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견문록
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 지음
김 철 옮김 /이숲 출판사
가격 1만3000원
흐리고 바람이 불던 1888년 3월의 어느날. 미국 시카고 여자의과대학 출신인 릴리어스 호톤 양이 제물포 항구에 내린다. 그때 나이 서른일곱. 모험을 하기에 여자로선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의사겸 선교사로서 조선에 파견된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 머나먼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합병된 뒤인 1921년 타계하기까지 마지막 반평생을 조선에서 지냈다. 그것으로도 인연이 모자랐는지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한국과의 인연을 따진다면 그녀의 가족이 대대로 한결같다. 이 땅에서 만나 배필로 맺어진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렇고, 아들 원한경과 손자인 원일한 요한 형제가 그렇다. 몇해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원한광 박사에 이르기까지 4대째 이어진 인연이다.
이처럼 그녀와 남편 언더우드가 조선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한 가운데서도 어려움으로 웃고 눈물짓던 초창기 15년 동안의 얘기를 담은 것이 바로 이 ‘조선 견문록’이다. 크게 보면 의료선교 활동의 기록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외국인의 눈길로 그려낸 그때의 생활상은 지금 우리에게도 흥미롭다. 여자 특유의 세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바라봤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선교사들과 왕실과의 밀접했던 관계도 새롭게 소개된다. 이를테면, 이 책은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의 지침서인 셈이다.
당시 구한말의 한반도는 격동기였다. 일찌감치 식민 야욕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던 일본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의 군사적 책동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도 수시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 뿐이었다.
이러한 외세의 간섭이 아니라도 백성들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헐벗고 가난했다. 하루 세끼만 해결해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헐렁한 무명옷 한벌로 사시사철을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전근대적인 관습과 미신에서도 벗어나지 못할 때였다.
저자는 이런 모습을 연민의 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바라본다. 조선 민족이 지저분하고 느려 터졌다는 당초의 생각이 점차 낙천적이며 태평스럽고 너그럽다는 식으로 바뀌어가는 것도 그런 과정에서였을 것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을 떠난 조선인들이 부지런하다는 사실까지 들어가며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외국인인 저자가 그럴 정도였다면 당사자인 우리 백성들의 애간장이야 과연 어떠했을까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조정은 무능했고 궁궐에 드나드는 간신배들은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며 제 안위만을 챙기기에 바빴다. 그것이 당시 조선의 운명이며, 한계였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도 만연했다. 과거시험에 합격하려면 미리 적당히 돈을 써야 했다. 조정에서 선교사들에게 끊어준 통행증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어느 고을의 원님도 아마 돈으로 벼슬을 샀을지 모를 일이다. 번져가는 콜레라 치료를 위해 조정이 비용을 지출했으나 여기저기서 빼내가는 바람에 방역활동에 애로를 겪었다는 게 저자의 경험담이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을사조약을 거쳐 헤이그 밀사사건 직전까지의 기간을 관통하고 있다. 본인이 역사의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서 참고할 가치가 충분하다.
가장 눈길이 쏠리는 부분은 역시 왕실 내부의 돌아가던 상황이다. 그녀가 명성황후의 시의로 자주 알현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이니 만큼 사실성도 돋보인다. 명성황후의 개인적 인품은 물론 옆에서 관찰한 얼굴 표정과 머리 장식 등의 표현에서는 뛰어난 관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명성황후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통역이 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을미사변으로 황후가 일본 자객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을 때 누구보다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는지 모른다.
물론 개인적인 편견이 드러나는 부분도 전혀 없지는 않다. 대원군을 나쁘게만 표현했다거나,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의 처사가 당연하다는 투의 대목이 그런 사례다. 저자도 이미 사건의 이해관계 한켠에 들어 있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종교적인 신념과 가치를 떠나서도 매우 눈물겹게 다가온다. 의료 및 교육활동이 함께 어우러졌으니 한때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접했던 허균이나 대장금의 한 장면이 떠오를 정도다.
위생 불량으로 걸핏하면 돌림병이 나돌았다. 도랑은 온통 쓰레기에 막히고 구정물 구덩이엔 파리떼가 들끓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적 몇장을 문간에 붙이거나 푸닥거리로 때우는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던 때였다.
정식 교육을 받은 의사로서 그녀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어린 세딸을 둔 젊은 과부의 죽음을 눈물로 보냈으며, 아들을 묻고 나서 자신도 목숨을 끊은 어느 아버지의 애틋한 얘기도 소개되고 있다. 거의 죽다시피 한 환자를 며칠의 진료 끝에 살려내는 장면에서는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감동이 느껴진다.
언더우드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겸해 개성과 평양을 거쳐 압록강변의 강계, 의주까지 선교활동에 따라나섰던 그녀의 담대함도 기억할 부분이다. 이들 부부가 그때의 여행에서 이미 휴대용 간이 침대와 고무 욕조를 갖고 다녔으며 여인숙에 들 때마다 사람들이 창호문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보았다는 얘기는 양념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에 대한 신변보장을 장담하기 어려운데다 산짐승이 우글거리고 산길도 험할 때였다. 주변의 만류 속에 떠난 신혼여행이었다. 실제로 도중에 산적떼를 만나 목숨이 위태로운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사실은 그녀의 생애가 이런 과정의 연속이나 다름없었다.
저자의 모험정신과 희생정신에서 굳이 의미를 찾자면 신앙과 교육, 문명의 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그런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얘기 자체가 워낙 재미있기 때문이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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