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처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일반적으로 뜨내기를 상대하는 역이나, 버스터미널 근처를 피하라고 한다.
봉평장과 같은 자그마한 곳에서는 어떤 식당을 찾아야 하나? 봉평장 이곳 저곳에는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는 막국수집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나의 감각은 장터의 장옥 근처, 장이 서던 자리로 발길을 이끈다. 새로 짓지 않은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있음직한 식당이 있다. 국수집은 미어 터지고 있었다. 영남인의 발빠른 기지로 겨우 옥수수막걸리 한 옹가지와 막국수 두 그릇을 챙겼다. 벌써 한 시간째 기다렸다고 짜증을 내는 손님도 더러 보였다.
● 옹심이를 아시나요
메밀이 흔한 곳이니 묵이나 냉면(강원도에서는 막국수라고 하는 모양이다)이라는 이름은 알겠는데, 옹심이(옹시미, 새알심)란 이름도 있었다. 물어보니 우리의 ‘수제비’란다. 물론 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3남의 평야에서는 봄 가뭄이 심하여 벼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대신 파종하는 대파작물이다. 메밀은 한발이 심할 때 사람들을 먹여 살렸던 구황식품이었다.
산골 강원에서는 우리의 보리나 벼에 해당하는 작물이다. ‘끈기 없기로’ 이름난 식품이다. 이른바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음식들이다.
봉평장과 같은 아늑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지 못하고 떠나는 일정의 촉박함을 원망하며 강릉을 향했다.
● 오대산을 넘다
강릉으로 들어가는 길을 두고 얼마간 고민을 했다. 영동고속도로의 정체 때문이다.
계속 국도를 따라 가는 길은 너무나 많은 고개가 도사리고 있어 선배 L교수는 피하고 싶어했다. 일단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내리기로 하였다. 대관령 근처에서 교통사고와 함께 이틀의 연휴를 즐기러 나온 수도권 사람들로 서서히 정체가 시작되자 우리는 오대산을 넘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게는 오대산 소금강이 ‘만성 두통’을 해결해 준 대학시절 추억의 계곡이다.
아무리 덩치가 큰산이라 하더라도 산을 관통하는 자동차도로의 개설은 인간의 무지함으로 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월정사 또한 들리지 못하고 가야한다. 바쁜 일정을 잡은 선배를 은근히 원망해본다.
● 잘못 배운 역사, 잘못 가르치는 역사
그 유명한 오죽헌이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는 조선 여성의 대표로 신사임당, 그 아들은 이이를 조선 남성의 대표로 배우며 자랐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집이다.
70년대에 쏟아 부은 정비사업비로 대단한 으리으리함이다. 그 부지 내에는 향토 사료관과 역사관 2개의 건물이 따로 더 있다.
괜히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바쁘게 돌아 나와서 가까운 경포대의 솔숲에 자리한 사임당과 사뭇 다른 여성인 허난설헌과 풍운아 허균 자매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강릉시에서 매입하고 개보수하여 그나마 깨끗한 기운은 있으나 사람의 온기가 없는 휑하니 빈집이다. 답사를 온 건축공학과 학생들, 그리고 드문드문 그 마을에 유명한 순두부를 먹으러 관광객 수명이 기웃거릴 따름이다.
자, 이제 왜 우리가 역사에 대해 무지한가를 살펴보자.
사임당과 율곡은 거의 다 알아도 난설헌과 교산은 대개 잘 모른다. 최근 난설헌은 페미니즘에 의해 재조명 받고 있고 교산은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절대 다수의 인구가 문자(한문) 해득 능력이 없던 때, 그는 한글소설을 지었다. 대중에게 끼친 영향은 성리학자인 율곡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율곡 선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특별히 폄하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70년대 지나치게 큰 인물로 조장된 인물들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 없이 그대로 받아드리는 경향을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대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엄정한 평가 없이 집권세력의 평가를 그냥 수용하기만 한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역사도 재단하는 세태를 우리는 많이 겪었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년∼1589년)
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 별호 경번(景樊). 본명 초희(楚姬). 강릉 출생. 균(筠)의 누이.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으며,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 일부를 동생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1504년∼1551년)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思任堂·師妊堂) 시임당(媤妊堂) 임사재(任師齋)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침공(針工)·자수(刺繡)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작품으로 시에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사친(思親)》 등이 있고, 그림에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등이 있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
봉평장과 같은 자그마한 곳에서는 어떤 식당을 찾아야 하나? 봉평장 이곳 저곳에는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는 막국수집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나의 감각은 장터의 장옥 근처, 장이 서던 자리로 발길을 이끈다. 새로 짓지 않은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있음직한 식당이 있다. 국수집은 미어 터지고 있었다. 영남인의 발빠른 기지로 겨우 옥수수막걸리 한 옹가지와 막국수 두 그릇을 챙겼다. 벌써 한 시간째 기다렸다고 짜증을 내는 손님도 더러 보였다.
● 옹심이를 아시나요
메밀이 흔한 곳이니 묵이나 냉면(강원도에서는 막국수라고 하는 모양이다)이라는 이름은 알겠는데, 옹심이(옹시미, 새알심)란 이름도 있었다. 물어보니 우리의 ‘수제비’란다. 물론 재료는 메밀이다.
메밀은 3남의 평야에서는 봄 가뭄이 심하여 벼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대신 파종하는 대파작물이다. 메밀은 한발이 심할 때 사람들을 먹여 살렸던 구황식품이었다.
산골 강원에서는 우리의 보리나 벼에 해당하는 작물이다. ‘끈기 없기로’ 이름난 식품이다. 이른바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음식들이다.
봉평장과 같은 아늑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지 못하고 떠나는 일정의 촉박함을 원망하며 강릉을 향했다.
● 오대산을 넘다
강릉으로 들어가는 길을 두고 얼마간 고민을 했다. 영동고속도로의 정체 때문이다.
계속 국도를 따라 가는 길은 너무나 많은 고개가 도사리고 있어 선배 L교수는 피하고 싶어했다. 일단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내리기로 하였다. 대관령 근처에서 교통사고와 함께 이틀의 연휴를 즐기러 나온 수도권 사람들로 서서히 정체가 시작되자 우리는 오대산을 넘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게는 오대산 소금강이 ‘만성 두통’을 해결해 준 대학시절 추억의 계곡이다.
아무리 덩치가 큰산이라 하더라도 산을 관통하는 자동차도로의 개설은 인간의 무지함으로 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월정사 또한 들리지 못하고 가야한다. 바쁜 일정을 잡은 선배를 은근히 원망해본다.
● 잘못 배운 역사, 잘못 가르치는 역사
그 유명한 오죽헌이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는 조선 여성의 대표로 신사임당, 그 아들은 이이를 조선 남성의 대표로 배우며 자랐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집이다.
70년대에 쏟아 부은 정비사업비로 대단한 으리으리함이다. 그 부지 내에는 향토 사료관과 역사관 2개의 건물이 따로 더 있다.
괜히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바쁘게 돌아 나와서 가까운 경포대의 솔숲에 자리한 사임당과 사뭇 다른 여성인 허난설헌과 풍운아 허균 자매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강릉시에서 매입하고 개보수하여 그나마 깨끗한 기운은 있으나 사람의 온기가 없는 휑하니 빈집이다. 답사를 온 건축공학과 학생들, 그리고 드문드문 그 마을에 유명한 순두부를 먹으러 관광객 수명이 기웃거릴 따름이다.
자, 이제 왜 우리가 역사에 대해 무지한가를 살펴보자.
사임당과 율곡은 거의 다 알아도 난설헌과 교산은 대개 잘 모른다. 최근 난설헌은 페미니즘에 의해 재조명 받고 있고 교산은 홍길동전의 저자이다.
절대 다수의 인구가 문자(한문) 해득 능력이 없던 때, 그는 한글소설을 지었다. 대중에게 끼친 영향은 성리학자인 율곡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율곡 선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특별히 폄하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역사적 인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70년대 지나치게 큰 인물로 조장된 인물들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 없이 그대로 받아드리는 경향을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대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엄정한 평가 없이 집권세력의 평가를 그냥 수용하기만 한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역사도 재단하는 세태를 우리는 많이 겪었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년∼1589년)
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 별호 경번(景樊). 본명 초희(楚姬). 강릉 출생. 균(筠)의 누이.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으며,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 일부를 동생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1504년∼1551년)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思任堂·師妊堂) 시임당(媤妊堂) 임사재(任師齋)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침공(針工)·자수(刺繡)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작품으로 시에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사친(思親)》 등이 있고, 그림에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등이 있다.
권이문 금오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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