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일곱번째 연인 자클린 로크는 도자기 공장 관리인의 조카였고 공장의 뒷일을 돌보는 젊은 이혼녀였다. 자클린은 1954년에 40세 연상이었던 74세의 피카소를 만났다. 평소 화가로서의 피카소를 매우 동경해 왔던 그녀는 피카소를 필사적으로 유혹한다. 결국 만난 지 7년째 되던 해인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마지막 여자가 될 쟈클린과 발로리스 시청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으로서 쟈클린은 피카소의 2번째 부인이 된다. 그녀는 자의식이 강했던 프랑수와즈와는 달리 "난 그를 위해 존재한다. 마지막 숨까지 그를 돌볼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피카소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피카소가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도록 도와주었다. 피카소에게 절대 헌신적인 여자였던 자클린은 피카소의 생의 훌륭한 동반자였다.
피카소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여성들을 사랑했다"고 고백하고 "여자들이 나를 차지하려고 다툴 때마다 이사를 가야 한다면 평생 이삿짐만 싸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는 또 "누구도 나를 떠나지 못한다"고 자신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유일하게 그를 떠나버린 프랑수와즈마저도 "그는 애완동물 다루듯 여성의 마음을 잘 풀어 주는 재능을 지녔다"고 감탄했다.
그는 1973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 별장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눈 내리는 4월10일 산비탈에 묻혔다. 피카소의 장례식에 마리 테레즈의 딸 마야, 프랑수아즈가 낳은 아들 클로드, 딸 팔로마는 결국 쟈클린의 완강한 거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쟈클린은 그 누구도 장례식에 들여놓지 않은 채로 마지막까지 피카소를 독차지하고 싶어했다. 평생 피카소의 운전사 노릇을 했던 장남 파울로조차도 장례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파올로는 평소에도 늘 술에 취해 있었는데 이 일로 더욱 심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피카소가 죽은 지 2년 만에 죽고 만다. 이 사건으로 파울로의 아들 파블리토(피카소의 손자)까지도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게 된다. 또한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죽은 지 3년후, 피카소를 만난지 50년 되는 그 날 다음과 같은 말을 딸에게 남기고 차고에 목매 자살했다. "사랑하는 내 딸 마야! 너를 영원히 사랑하지만 또 하나의 사랑을 찾아 떠난단다. 아버지와 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저 세상에 그가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면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다"
또한 그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쟈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후 검은 커튼을 내린 채 한번도 열지 않았고 식탁에 피카소 자리를 마련한 채 피카소의 망령을 잊지 못해 노래를 들려주거나 기이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 결국 쟈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현실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86년 권총 자살로 세상 마감하고 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피카소가 죽었을 때 남긴 작품은 거의 5만점 정도였다. 이는 실로 방대한 양이다. 피카소 생전에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피카소 자신이었다. 피카소는 현대사에서 아인슈타인 다윈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피카소에 관한 전기 영화는 '피카소'가 유일하다. '피카소' 제작 당시 74세의 나이로 뉴욕에 살고 있던 프랑수와즈 질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데 가장 반대했으며, 아들 클로드 역시 아버지에 관한 영화를 자신이 직접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촬영 현장에 경찰까지 동원시켜 방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갈등 불안 전쟁 고난 아픔을 같이 한 끝없는 삶과 예술, 괴로워하면서 절망하면서 갈등, 증오와 한정된 인생의 지평을 무한대로 열어 준 천재 예술가요 여자를 너무 사랑한 열정과 광기의 소유자였다. 피카소는 미의 힘으로 통해서 돈과 전쟁과 사랑까지 지배한 영원한 독재자였던 것이다.
고유나 리포터 yn12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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