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재산 얼마인지 모릅니다”

남편 경제권독점에 속앓이 주부 많아

지역내일 2003-07-29
아직까지 남편이 가정에서 경제권을 독점하는 행태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주부들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29일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지난 3월 한 달 동안에만 7건의 상담이 들어올 정도라는 것.
문제는 생활비 등 가계 경제로 인해 소소한 다툼이 쌓이면서 심각한 갈등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남편들이 ‘시시콜콜 알아서 뭐하냐’며 무신경하게 반응하는 것과 달리 아내들은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는 듯한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이 가정법률상담소의 분석이다.
상황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가정 내 재산이나 경제 분배 문제는 이혼 시에만 부각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전업주부 박씨 사례= 경기도에 사는 전업주부 박지영(37·가명)씨는 “남편하게 구질구질하게 빌다시피 해 생활비 몇만원 받아야 하는 처지가 비참해질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장을 볼 때 남편이 따라 나서는 것은 기본. 짐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식이든 생필품이든 가장 싼 물건을 장바구니에 먼저 담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는 것.
본의 아니게 박씨는 남편에게 ‘이쁜이’로 통한다. 머리 손질은 2년에 한 번 꼴. 그래도 예쁘기만 하고, 정장은커녕 티셔츠만으로 멋쟁이라는 칭찬을 듣는다. 화장품은 샘플을 쓰고 있어도 절대 떨어졌느냐 묻는 법이 없고, 속옷도 세일판매대 외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들어가는 비용에 유난히 민감했다.
당하는 아내 입장이 얼마나 힘들고 심한 모멸감으로 정신적 상처를 입는지 모르는 것이다.
박씨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결혼 초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사를 다니다 4년 전 사업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돈 관리는 남편에게로 넘어갔다. 수입이 일정치 않으니 조절하기도 용이했고, 은행을 왔다갔다하는 일도 순발력 있는 남편이 맡는 것이 편했다. 그것이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일 년 이 년이 지나면서 지금의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박씨는 “남이 알까 창피한 것은 둘째고 이런 문제로 얘기하는 내 자신까지 초라해 싫다”면서 “수없이 싸우고 바꿔 보려고 해도 변화가 없다. 그렇다고 결정적인 하자라 얘기하기도 힘들어 나만 체념과 인내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토로했다.

◆이혼사유로 비화되기도= 그래도 다행히 박씨의 경우는 부부 한쪽의 양보와 포기로 큰 문제로까지 비화하지는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부부관계에 균열이 가 ‘이혼’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송미자(62)씨가 그런 경우.
“남편은 젊어서부터 돈 관리를 해 왔다. 요즘도 한 달에 30만원 정도만 준다. 이것도 싸워서 겨우 받게 된 것이다. 생활비가 항상 부족해 아들딸이 용돈을 조금씩 주면 그걸로 근근이 생활한다. 돈 얘기를 꺼내면 남편은 대뜸 ‘네가 한 것이 무엇인데’라는 말한다. 아주 없는 집도 아니다. 자신이 번 돈이라며 주지 않는 것이다. 남편과 이혼하고 재산을 받아 마음 편히 살고 싶다.”
이영순(42)씨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벼르다 벼르다 올해 초에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을 공개하라고 했더니 남편은 지금까지처럼 살라했다”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강하게 이혼을 요구했더니 협의이혼은 해줄 수 없으니 재판이혼을 청구하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털어놓았다.

◆현 제도가 이혼을 부추긴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경우 생활비 갈등이란 단순한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편이 가정 경제권 전체를 차츰 독점하면서 가계 경제 전반에 걸쳐 아내를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란 분석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상담위원은 “경제권 독점은 부부재산 관련 상담 중 가장 흔하고 현실적으로 많은 전업주부들이 고통을 당하는 주제”라면서 “재산을 남편 명의로 해야 위계가 잡힌다는 가부장적 사고로 재산관리권이 남편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은데 결과적으로 부부 위상에서 불균형을 초래한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현행 별산제 하에서는 재산형성 과정과는 상관없이 재산에 대한 권리가 부부동등하게 인정되지 않고 재산 분할은 이혼 시에만 인정된다는 점. 현 제도가 이혼을 부추긴다는 혐의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 위원은 “배우자가 생활비를 주지 않거나 무리한 보증을 서는 등 기초재산을 위태롭게 해도 이혼소송으로 가지 않는 한 재산형성에 대한 기여분을 찾을 방법이 막혀 있다”면서 “노년으로 갈수록 경제적 자립이 중요한데 한 배우자가 전권을 행사하는 상태를 방치하는 민법 관련 조항을 손질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위원은 또 “연세가 있는 경우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혀 온 남편이 생활력이 떨어진 뒤 경제권으로 아내를 붙잡아 두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상대의 경제권을 존중할 때 부부관계도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손정미 기자 jmsh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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