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지난 88년부터 시작해서 현재 15년째 시간강사를 해오고 있는 권 아무개(43)씨는 두 아이의 엄마다. 출강하고 있는 모교에서 지난 2년간 여름학기 강의를 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한 학기 인생’인 시간강사로서는 다음 학기 강의를 맡게 될 것인지 여부를 물어볼 데가 없다. 방학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지난해까지 그가 맡았던 강의가 남자 후배에게 주어졌다는 걸 알았다.
남편이 있는 그가 ‘가장’으로서 식구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남자들에게 강의 배당에서 밀려본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국문학 중 한문학 전공인 자신이 맡았던 고전 과목을 비전공자인 남자 후배에게 배정했다는 점이 더 씁쓸했다. 권씨의 하소연이다.
“시간강사가 고용이 불안정하고 수입이 빠듯해 힘들다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들은 더 불리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느 학교나 강의 배정에서 ‘남자 가장’ 우선이라는 건 공공연한 상식인데도.”
남자들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릴 생계 부담의 책임이 고려되는 반면, 기혼 여자 강사에게는 ‘남편이 버니까’, 독신 여강사에게는 ‘입이 하나니까’라는 이유로 양보가 요구된다.
“우리에게도 강의는 절실한 생계 수단이다. 결혼한 이는 남편과 가정 경제를 분담해서 자녀를 양육하고 있고 미혼자는 부모를 봉양하거나 1인 가족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런데 여자가 공부해서 박사가 됐다고 하면 일단 ‘너희는 하고 싶은 걸 했으니 되지 않았냐’라는 투로 유한마담의 취미 생활 취급을 하는 것이 기가 막힌다는 것이 여성 시간강사들의 하소연이다.
◆공공연한 여성강사 기피현상= 권씨는 다른 대학에 출강하는 동료 여강사로부터도 비슷한 경험을 전해 들었다. 지도 교수의 연구실에 의논 차 들렀던 길인데 마침 한 지방 대학에서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강사가 필요하니 사람을 보내달라는 전화였다.
그 교수는 해당 전공자인 자신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도 “지금 당장은 보낼 사람이 마땅치 않다”고 말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 교수에게 있어 ‘지금 보낼 사람’은 ‘지금 보낼 남자’를 의미하는 거였다.
“지방 대학의 경우 강사로 출강을 하다가 교수가 될 가능성이 서울보다 큰 편이다. 여자 강사를 보냈다가는 그 자리가 교수로 이어지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서 기피한다”는 것이 권씨의 설명이다.
지난 학기에 권씨가 맡은 강의는 6과목. 일주일에 18시간 수업을 뛴 대가로 들어온 수입은 월 1백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나마 권씨의 경우 학교마다 교양과목이 많은 국문학 전공이라서 한 학기 6과목을 맡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박봉을 받으면서도 인문대 박사 수료자 또는 학위자들이 시간강사를 계속하는 이유는 언젠가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서다. 교수 임용에 시간강사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강의 배정이나 연구 프로젝트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밀린다.
◆남성의 인맥에 밀리는 여자 강사= 남자들은 생계 책임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경력과 활동을 쌓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수 임용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94년부터 10년째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송 모(38)씨는 “인문학에서는 뚜렷이 맞고 틀리는 것도 없고 획기적이거나 새로운 발견 같은 업적도 없다. 자연히 여러 가지 기회에 참여해서 일을 많이 하다보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돈 생기는 일에 먼저 끼워주는 혜택을 받는 남자들이 활동도 많아져서 경력 관리, 교수 임용에까지 이익을 챙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교수 채용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누가 얼마나 학과에 기여할 인재인가’이다. 학과에 들어올 새 인물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산이 면밀히 계산된다. 남자 교수가 들어오면 그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졸업생 취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등의 비교를 안 할 수 없다는 것.
7년간의 시간강사 경력을 거쳐 지난해 가까스로 교수로 채용된 양 모(42)씨는 “교수 정원이 많지 않은 학과에 여성 교수가 이미 한 명 있다고 하면 새 후보자는 남자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학과 운영을 좌우하는 게임이 남자 위주로 돌아가는 판인데 남자가 들어오는 게 학과에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교수들의 노동을 돈을 주고 사들이는 입장인 학교측에서 볼 때, ‘가족을 부양하는 남자는 아무래도 학과를 위해 목숨을 걸겠지’라는 기대를 무시 못한다고 덧붙였다.
기혼 여성 강사들은 육아, 살림의 가정일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보수가 낮은 강사직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남자들보다 교수 임용 전에 포기하는 비율도 높다. 교수 임용의 꿈이 한 해 두 해 멀어지면서 ‘애도 제대로 못 돌보고 살림도 안 하면서 버는 게 겨우 그거냐’라는 남편과 시집의 냉랭한 시선이 견디기 힘들어진다.
◆자부심과 보람으로 버텨=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유정아 책임연구원은 “지난 10년간의 시간강사 생활을 돌아보면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의 벽이 너무 높음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요즘은 젊은 남자들이 육아 분담 안 하고는 못 견딘다. 어린 자식이 있는 아빠 교수들은 애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자들한테만 교수 임용 면접에서 ‘애가 있는데 일하기 괜찮겠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교수 임용에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여자로서의 불리함을 의식하고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은 강고한 착취구조 속에서 ‘이미 권력을 가진 자의 뒤치다꺼리’만 신나게 해준 결과였다는 씁쓸한 기억도 있다.
여성 강사들은 ‘교수 지위를 다양화해 시간 강사들을 연구 인력으로 채용하는 방안’ 등의 제도적 보완으로 고용이 안정되기를 희망한다.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실시해온 연구 프로젝트는 많은 인문학계 박사 강사들에게 ‘가뭄에 단 비 같은’ 경제적 지원이었다.
권씨는 “강사들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나 연구 인력 고용 등의 제도적 정비가 이뤄지기를 바란다”면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은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자부심과 보람이었다. 계속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금 더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오진영·김남성 기자 kns1992@naeil.com
‘한 학기 인생’인 시간강사로서는 다음 학기 강의를 맡게 될 것인지 여부를 물어볼 데가 없다. 방학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지난해까지 그가 맡았던 강의가 남자 후배에게 주어졌다는 걸 알았다.
남편이 있는 그가 ‘가장’으로서 식구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남자들에게 강의 배당에서 밀려본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국문학 중 한문학 전공인 자신이 맡았던 고전 과목을 비전공자인 남자 후배에게 배정했다는 점이 더 씁쓸했다. 권씨의 하소연이다.
“시간강사가 고용이 불안정하고 수입이 빠듯해 힘들다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여자들은 더 불리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느 학교나 강의 배정에서 ‘남자 가장’ 우선이라는 건 공공연한 상식인데도.”
남자들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릴 생계 부담의 책임이 고려되는 반면, 기혼 여자 강사에게는 ‘남편이 버니까’, 독신 여강사에게는 ‘입이 하나니까’라는 이유로 양보가 요구된다.
“우리에게도 강의는 절실한 생계 수단이다. 결혼한 이는 남편과 가정 경제를 분담해서 자녀를 양육하고 있고 미혼자는 부모를 봉양하거나 1인 가족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런데 여자가 공부해서 박사가 됐다고 하면 일단 ‘너희는 하고 싶은 걸 했으니 되지 않았냐’라는 투로 유한마담의 취미 생활 취급을 하는 것이 기가 막힌다는 것이 여성 시간강사들의 하소연이다.
◆공공연한 여성강사 기피현상= 권씨는 다른 대학에 출강하는 동료 여강사로부터도 비슷한 경험을 전해 들었다. 지도 교수의 연구실에 의논 차 들렀던 길인데 마침 한 지방 대학에서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강사가 필요하니 사람을 보내달라는 전화였다.
그 교수는 해당 전공자인 자신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도 “지금 당장은 보낼 사람이 마땅치 않다”고 말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 교수에게 있어 ‘지금 보낼 사람’은 ‘지금 보낼 남자’를 의미하는 거였다.
“지방 대학의 경우 강사로 출강을 하다가 교수가 될 가능성이 서울보다 큰 편이다. 여자 강사를 보냈다가는 그 자리가 교수로 이어지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서 기피한다”는 것이 권씨의 설명이다.
지난 학기에 권씨가 맡은 강의는 6과목. 일주일에 18시간 수업을 뛴 대가로 들어온 수입은 월 1백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나마 권씨의 경우 학교마다 교양과목이 많은 국문학 전공이라서 한 학기 6과목을 맡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박봉을 받으면서도 인문대 박사 수료자 또는 학위자들이 시간강사를 계속하는 이유는 언젠가 교수로 임용되기 위해서다. 교수 임용에 시간강사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강의 배정이나 연구 프로젝트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밀린다.
◆남성의 인맥에 밀리는 여자 강사= 남자들은 생계 책임자라는 이유로 더 많은 경력과 활동을 쌓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수 임용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94년부터 10년째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송 모(38)씨는 “인문학에서는 뚜렷이 맞고 틀리는 것도 없고 획기적이거나 새로운 발견 같은 업적도 없다. 자연히 여러 가지 기회에 참여해서 일을 많이 하다보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돈 생기는 일에 먼저 끼워주는 혜택을 받는 남자들이 활동도 많아져서 경력 관리, 교수 임용에까지 이익을 챙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교수 채용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누가 얼마나 학과에 기여할 인재인가’이다. 학과에 들어올 새 인물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산이 면밀히 계산된다. 남자 교수가 들어오면 그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졸업생 취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등의 비교를 안 할 수 없다는 것.
7년간의 시간강사 경력을 거쳐 지난해 가까스로 교수로 채용된 양 모(42)씨는 “교수 정원이 많지 않은 학과에 여성 교수가 이미 한 명 있다고 하면 새 후보자는 남자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학과 운영을 좌우하는 게임이 남자 위주로 돌아가는 판인데 남자가 들어오는 게 학과에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교수들의 노동을 돈을 주고 사들이는 입장인 학교측에서 볼 때, ‘가족을 부양하는 남자는 아무래도 학과를 위해 목숨을 걸겠지’라는 기대를 무시 못한다고 덧붙였다.
기혼 여성 강사들은 육아, 살림의 가정일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데 보수가 낮은 강사직을 병행하기가 힘들어 남자들보다 교수 임용 전에 포기하는 비율도 높다. 교수 임용의 꿈이 한 해 두 해 멀어지면서 ‘애도 제대로 못 돌보고 살림도 안 하면서 버는 게 겨우 그거냐’라는 남편과 시집의 냉랭한 시선이 견디기 힘들어진다.
◆자부심과 보람으로 버텨=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의 유정아 책임연구원은 “지난 10년간의 시간강사 생활을 돌아보면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의 벽이 너무 높음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요즘은 젊은 남자들이 육아 분담 안 하고는 못 견딘다. 어린 자식이 있는 아빠 교수들은 애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자들한테만 교수 임용 면접에서 ‘애가 있는데 일하기 괜찮겠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교수 임용에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여자로서의 불리함을 의식하고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은 강고한 착취구조 속에서 ‘이미 권력을 가진 자의 뒤치다꺼리’만 신나게 해준 결과였다는 씁쓸한 기억도 있다.
여성 강사들은 ‘교수 지위를 다양화해 시간 강사들을 연구 인력으로 채용하는 방안’ 등의 제도적 보완으로 고용이 안정되기를 희망한다.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실시해온 연구 프로젝트는 많은 인문학계 박사 강사들에게 ‘가뭄에 단 비 같은’ 경제적 지원이었다.
권씨는 “강사들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나 연구 인력 고용 등의 제도적 정비가 이뤄지기를 바란다”면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은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자부심과 보람이었다. 계속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금 더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오진영·김남성 기자 kns1992@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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