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번역본 윤동주 시집 ‘동주’는 265명의 정성이 보태져 세상에 나왔다. 교사, 학생, 번역가가 한 마음으로 주머니를 털고 재능을 나누며 책 출판을 위해 1년6개월 동안 힘을 모은 덕분이다.
심형철 오금고 중국어교사는 종로구 자하문 고개에 자리 잡은 아담한 윤동주문학관을 찾았다. 일본 감옥에서 고통스럽게 숨진 청년 시인 윤동주를 만나러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 중 열에 하나는 중국인이었다.
윤동주문학관에서 만난 중국인들 보고 결심
허나 문학관 내 중국어 안내 자료는 허술했다. 무엇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처럼 가슴 울리는 윤동주의 시가 중국어로 소개되지 않았다. 한국어를 모르는 중국인들은 벽에 붙은 시인의 시를 멀뚱멀뚱 구경만 했다.
심 교사는 1994년 여름 중국 용정의 윤동주 무덤을 찾았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공동묘지 헤매다 발견한 윤동주 이름 석 자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중국인들도 작가의 출생지가 중국 북간도라 심리적으로 가깝게 여긴다. “중국어로 된 윤동주 시집을 만들어 중국인들에게도 윤동주 시를 읽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는 결심을 굳혔다.
지자체, 정부기관에 수소문했지만 예산을 이유로 다들 난색을 표했다. 궁리 끝에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을 모아 직접 제작에 나섰다.
270여명이 힘 합해 만든 중국어판 윤동주시집
우선 윤동주 시의 서정을 중국어로 맛깔스럽게 옮길 번역가로 중국 유학시절 인연을 맺은 20년 지기 조선족 허동식 시인이 떠올랐다. 중국어, 한국어에 두루 능통한 시인인데다 무엇보다 한국시에 애정이 깊었다.
시인은 흔쾌히 친구의 부탁대로 1년여 시간 동안 시 번역에 몰두했다. 인쇄비는 전국의 중국어교사들이 뜻을 모았다. 중국을 읽어주는 중국어교사 모임을 이끌고 있는 심 교사가 동료들에게 윤동주 시집 번역본 출간의 뜻을 내비치자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보냈다.
1만원, 3만원, 5만원, 10만원... 전국의 중국어 교사들이 보낸 성금은 금새 430만원이 됐다. “과연 기부금이 모아질까? 내심 걱정이 컸는데 전국의 중국어교사들이 선뜻 동참해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힘이 많이 됐지요”
오금고에 함께 근무하는 유장렬 미술교사는 책 표지 디자인을 맡았고 미술반 제자 11명은 시에 들어갈 삽화를 그렸다. 한국어 시 낭송 녹음은 학생들이 목소리 재능기부가 보태졌다. 동료 국어교사들은 시집에 실을 60편의 시를 골라 원고 교정을 맡고 학생들의 시 낭송 지도를 도왔다.
시사중국어사 대표는 인쇄비만 받고 시집 출판을 맡아주었다. 게다가 시 낭송할 중국인 성우와 다리를 놓아주었고 녹음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같은 재능기부와 세심한 노력 이 더해진 덕분에 시집에 QR코드를 대면 한국어와 중국어로 두루 감상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1년 6개월 만에 세상에 나온 윤동주 시집을 심 교사는 지난 9월 윤동주문학관에 전달했다. 이제 문학관을 찾은 중국인들을 윤동주 시를 중국어로 감상하고 시집을 무료로 가져갈 수 있게 됐다.
“여러 사람의 선의가 모아진 책이라 의미가 큽니다. 고교생 제자들도 본인들이 그림을 그리고 목소리를 녹음해 완성된 책으로 만들어지자 뿌듯해 하더군요. 사실 2백여 명이 넘는 이들과 공동작업이라 한 명 한 명 신경 쓰고 조율하며 협의해야 할 일들이 많았어요. 완성된 번역판 시집 속에는 그간의 사연과 추억이 묻어있는 셈이지요”라며 심 교사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시집 끄트머리에는 책 출간에 힘을 보탠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윤동주 시’로 연결되는 한국과 중국
윤동주 시집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심 교사는 국내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대학과 어학당에 골고루 기증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북경 등 50여 곳의 중국 유명 대학 한국어과에도 책을 보낼 예정이다.
“한국과 중국은 경쟁자이면서 동반자입니다. 일제침략이란 아픔을 공유하는 두 나라가 중국 출생의 윤동주 시인을 매개로 발전적인 미래 파트너가 되길 바라며 여러 곳에 중국어 시집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어를 가지고 양국을 잇는 우리 중국어 교사들의 소임이라 생각합니다” 심 교사가 담백하게 덧붙인다.
▮삽화, 시낭송 재능 기부한 오금고 학생들
윤동주 시집 발간에는 고교생 15명이 그림으로, 목소리로 각자의 재능을 보탰다. 책 출간에 참여한 오금고 김서영, 장윤정, 배주희, 이윤서, 유준혁, 정건희, 조지훈 학생을 만났다.
“그림과 시를 연결 짓는 시화 작업으로 완성된 책을 보니 황홀해요.”, “그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윤동주 시인 관련 자료를 다양하게 찾아봤어요. 내 그림을 중국인들도 본다니 어깨가 으쓱하지요.” 시집 삽화 작업에 참여한 오금고 미술반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표지 디자인을 맡은 유정렬 미술교사는 학사모 쓴 윤동주 시인의 실루엣에 일부러 학생들이 그린 하늘, 별 같은 소재를 넣어 완성 했다. “교내 전시 경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해 책에 본인들의 작품이 실리니 뿌듯해 합니다. 고3 바쁜 시간을 쪼개 참여한 의미 있는 경험이었지요”라고 유 교사는 덧붙인다.
시낭송에 참여한 학생들 역시 상기된 표정이다. “난생 처음 전문 녹음실에 가봤어요. 녹음된 목소리가 쑥스러우면서도 뿌듯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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