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5월15일,그녀의 전화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울려댄다.
초등학생부터 여든이 넘는 학생들이 스승의 날을 맞아
감사의 인사,안부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평생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했다는 그녀,
누군가의 선생님으로 살아온 박이현 시인의 삶 속으로 잠시나마 들어가 보았다.
또래들의 검정고시 준비 돕는 소녀 선생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생들 학업 때문에 바로 대학 진학을 못 했어요.그때 제 공부를 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이 검정고시를 볼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어요.저와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학생들이었지만 아버지가 교육자이셔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자연스럽게 다가왔고,어려움을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도 어린 마음에 들었네요.”
그때 가르쳤던 첫 제자들이 이제 적게는40대 후반에서50대 후반까지 거의 중년을 넘어섰는데 여전히 연락을 하며 잘 지낸다고 박이현 시인은 전했다.
“몇 년 전 스승의 날에는,갑자기 중년 신사가 된 개구쟁이 남학생 제자가 무작정 차를 태워 갈 곳이 있다고 하더니 나이트클럽이라는 곳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깜깜한 곳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지며 제자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들고 있더라고요.그 녀석들 때문에 나이트클럽을 다 가봤네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몹시 난처했다고는 하나 박 시인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시인 엄마는 독서 논술 선생님
유아교육을 전공한 박 시인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던70년대 의성고등공민학교 새마을 유아원으로 발령을 받고 어린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당시 특유의 성실함과 창의적인 교수법으로 청와대에서 전국 최우수 교사 표창장을 받기도 했단다.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알았지만,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내 글을 써 보고 싶다는 문학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결혼 후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잠시 가르치는 일을 쉬게 되었을 때 문예창작과 수업을 들으면서 중간 중간 피곤한 몸을 일으켜 글을 쓰곤 했지요.”
90년대 초반,문예사조 시 부분 신인상으로 등단해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한국문인협회 성남지부,한국현대시인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본인의 자녀들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도 땄다.
“처음에는 내 아이들과 아이들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가르치려 했는데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독서 논술 수업을 하게 되었네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한글 선생님으로
분당으로 이사한 후 두 번째 선생님의 길을 걷다가 자녀들이 어느 정도 커서 오전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박 시인은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 항상 지니고 있었던 ‘나누는 삶’에 대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그래서 시작했던 것이 바로2008년에 시작한 성남 창세학교 문해교사였다.
“우리가 어릴 때 자연스럽게 한글을 깨우치는 시기를 놓치면한글을 배우는 것이 어려워집니다.말을 잘 하시니 쉽게 한글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르신들이 글을 배우는 것을 굉장히 어려워하셔요.그래서 다양한 연상법을 사용하기도 하고,주변 사물을 사용해 자음과 모음을 가르쳐드리기도 하지요.”
점점 학교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고 있어 처음에는 길지 않은 시간 봉사로 시작했던 창세학교 문해교사가 이제는 그녀의 삶의 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커져버렸다.그러나 배움에 목말라 있는 학생들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할 순 없었다.
주부들의 시낭송 선생님까지
일주일에4~5일,심지어 어떤 날은 오전과 야간,두 번 수업을 위해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를 몇 번씩 왕복하기도 한다.체력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지만,그래도 힘을 낸다.그녀에게 힘을 솟아나게 하는 ‘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면 이상하게 힘이 납니다.우연한 기회에 중앙도서관에서 ‘시 읽기’ 강좌를 맡아2014년부터 재능기부를 하고 있어요.많은 주부들이 시로 인해 위로를 받고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을 봅니다.신기한 것은 저도 시를 함께 읽으며 에너지를 받고 있다는 거죠.”
자기보다 고작 한두 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던 십대 소녀가 이제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여전히 그녀의 앞에는 그녀와 함께 한글공부를 하고 싶은 할머니 학생,시를 읽고 싶은 주부 학생,글 쓰는 법을 배우고 싶은 청소년 학생들이 두 눈을 반짝이고 있다.
“글을 쓰려고 촉을 세우는 행복한 시간부터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가르치는 시간까지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후회 없을 만큼 말입니다.”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