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안산시 승격 30년이 되는 해다. 1976년 시흥시 군자면과 수암면, 화성군 반월면 일대를 포함하는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 발표 후 10년 만인 1986년 1월 1일 안산시가 탄생했다. 30만 계획도시로 출발한 안산시는 시 승격 30년 만에 그 두 배인 70만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다. 반월공단 배후도시 안산은 한 때 악취와 높은 범죄율로 시련을 겪었지만 2차 신도시 개발 후 높은 녹지비율과 잘 닦인 도로, 편리한 대중교통 시설로 새로운 주거지로 급부상했다. 이제는 친환경 생태도시, 바다가 가까운 힐링도시의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새로운 성장을 준비 중이다.
안산의 변화 한 가운데서 하루 하루 삶을 살아 낸 안산사람들. 안산의 변화와 성장에는 이들이 흘린 땀방울이 있었다. 안산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안산시민 세 사람의 이야기를 싣는다.
“고잔신도시 개발 큰 마찰 없이 마무리 보람 커”
고잔 이주민 대책위 김려생 사무국장
고잔신도시 개발 당시 이주민 대책위 사무국장을 지낸 김려생(71세)씨의 안산살이는 신문에 실린 작은 광고부터 시작됐다. 서해안에 인구 30만 계획도시가 만들어진다는 공고문. 제천에서 4남매를 키우고 있던 그는 작은 공고문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작은 씨앗 같았던 희망을 안고 안산에 정착한 김려생 씨.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삶도 부침이 심했다. 그를 만나 신도시 개발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신도시 개발 공고문 ‘희망’을 안고 찾아온 안산
“그때 제천 인구가 5만이었는데 6배나 큰 도시를 만든다는 거야. 여기 가면 뭘 하던 자식들 굶길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지. 그래서 이사를 했지”
그가 안산에 발을 들인 1977년 6월은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이 발표 된 후 원주민들이 토지 보상을 받고 떠나던 때였다. “‘돈 벌려면 좀 더 일찍 왔어야지’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 계획은 그게 아니었거든. 막 노동이라도 해서 처자식 먹여 살릴 계획이었으니까. 길게 보고 정착을 하기로 맘 먹은 거야”
그가 정착한 곳은 안산 1단계 계획에서 제외된 고잔동이었다. “그 때 여기 고잔동은 국유지였어. 여기에 누가 살았느냐면 1959년 사라호 태풍이 대단했자나. 그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저 남쪽 사람들을 여기에 이주를 하게 한 거야. 그 사람들이 고잔뻘을 개간해서 일구고 살고 있었는데 한 300가구 되려나? 고잔 1리, 2리, 3리에 살고 있었어”
김려생 씨는 지금의 고잔역 앞에 ‘고잔사진관’을 열었다. 사진관이 귀한 시기였다. “그 때 사진관이 안산에 몇 개 없었어. 도일에 하나 있었고, 수암에 하나 있었으니까. 여기 근처에 사는사람들은 다 수원이나 안양에서 사진을 찍고 인화했었거든. 그래서 사진관을 열었지.”
사진이 귀하던 시절. 모든 기록이 사진으로 남던 시절이었으니 사진관을 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사진관 하면서 주민등록 갱신이 두 번 있었으니 그 때 안산 사는 사람들은 거의다 우리 사진관에서 사진 찍었을 거야. 그리고 졸업앨범도 많이 찍었지. 40~50대 안산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 졸업앨범을 보면 내가 찍어 준 사진이 많더라고”라며 껄껄 웃는다.
고잔신도시 개발 이주민 권리를 지켜라
그러다가 고잔신도시 개발사업이 시작됐다. “그 때 내가 고잔리 이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불하운동이었어. 우리가 살고 있던 땅이 나라 땅이었으니까 재산권을 행사할 수가 없지. 그래서 국가에 불하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운동을 벌인 거지” 당시 고잔리 이장이었던 김씨는 주민들을 대표해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불하가격은 평당 5000원. 주민들이 20여년 간 개간한 노력을 인정해 절반은 국가가 부담하기로 하고 주민들은 평당 2500원 5년간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불하가 결정됐다. 반월신공업도시 개발 당시 평균 보상가격이 평당 4000원 이었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땐 협상을 잘 해야 해. 내가 용산 참사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 중간에서 협상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니까”
이야기는 갑자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용산 참사 이야기로 튀어갔지만 그가 말하는 ‘협상의 중요성’에는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불하가 마무리 된 후 시작된 고잔 신도시 개발사업. 사업주체인 수자원공사와의 긴 협상의 중심에도 그가 있었다. 토지 보상, 입주권 등 재산권이 걸린 문제에 입주자들의 입장도 저마다 다 달라 의견을 조율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개발 계획이 알려지면서 투기꾼들도 많이 몰려왔지. 토지 주인이 입장 다르고 임차인 입장은 또 달라. 상가도 마찬가지였지. 주인이 있고 세입자가 있을 거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영업권에 대한 보상도 해 줘야 하거든. 그러니 이게 정말 쉽지가 않아. 그래도 최대한 주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데모도 하고 협상도 하고 참 힘들었어”
다행히 억울한 사람 하나 없이 적절한 보상이 이뤄졌고 원주민들의 몫으로 주어진 땅 위치도 좋았다. “다친 사람 하나 없이 사업이 끝났다는 게 제일 중요해. 고잔벌에 살던 사람들 보상 많이 받았지. 그런데 원주민들 중에는 그렇게 떵떵거리는 부자가 된 사람은 별로 없어 다들 순진하고 사업경험이 없어서 그랬을 거야”
아웅다웅 함께 했던 동네 사람들은 이제는 다 흩어져 경조사 때나 가끔 만나게 된다는 고잔동 사람들.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던 들판에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것을 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공단 · 주택지 · 신도시 전기 끌어댄
한국전력안산출장소 오 인 감리사
“어렵게 조성된 공단, 잘 돌아가길~”
안산시는 다른 농촌이나 어촌에 비해 전기가 일찍 들어온 지역이다. 농촌과 어촌이 함께 발달한 촌락 시흥군에서 에서 갑자기 산업도시인 안산시로 변경되면서 많은 기반시설이 다져졌고 그 중 하나가 ‘전기’였던 것이다.
오 익(시흥시 거모동· 69)씨는 안산이 산업기반기초를 다지던 40여 년 전, 한국전력 반월출장소(1974~1996)에 근무했었다. 오 씨는 70년대에 공무원시험과 제철회사입사시험 그리고 한전시험에 동시에 합격했었다고 한다. 그는 월급과 보너스가 가장 많은 한전을 택했고, 시민들의 편리와 안전을 위해 지금까지 전기에 대한 일을 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몇 번 씩 죽을 고비를 넘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안산 전 지역을 누비다
걷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전기검침과 정전원인을 찾으러 안산 전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는 오 씨에게 30여 년 전 안산의 모습이 어땠는지 물었다.
“그때는 ‘안산’이라는 지역은 없었고 모두 시흥군 군자면으로 불리던 때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일시장을 중심으로 많게는 30가구에서 적게는 5가구씩 동네가 형성되어 있었다.”
오 씨는 지금 시청이 있는 주변에는 아주 훌륭한 한옥이 있었고 2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국회의원을 지내던 이택돈 씨의 집으로 기억한다. 30여 가구 넘어 시장이 형성된 지역은 고잔역 주변과 별망에서 배가 들어와 수산시장이 열리던 사리를 제외하고는 듬성듬성 초가집과 슬레이트집이 대여섯 가구씩 모여 살던 동네였다.”
토지개발공사와 수자원공사 출장소가 있었던 도일시장 주변에서 오 씨 가족은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했고 지금도 그 곳에서 40여년이 넘도록 고향인 듯 살고 있다.
손전등 돌려 동차를 세우다
가장 어려운 것은 비만 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발생하는 정전사태! 고장 난 지점을 찾아 밤새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다녔다고 회상했다.
“‘강아지가 전봇대에 오줌만 싸도 전기가 나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정전이 자주 되던 시절이었다. 임해공업도시로 지정된 군자만 일대를 시찰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오는 날이면 초비상이었다.”
인천에서 안산으로 3366선를 통해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하던 시절, 차단기가 소래포구를 연결하는 다리에 있었다고 한다, 정전이 될 경우 다리 위까지 올라가야 스위치를 열수 있는 것이다. 오 감독은 비가 올 때 소래다리를 올라가는 것은 겁나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밤이라 깜깜하고 비는 오는데 옛날 소래다리를 기어 올라갔다. 때마침 협궤열차가 들어오는데 들고 있던 손전등을 마구 돌려 동차를 세웠던 적도 있었다. 참 아슬아슬한 기억이다.”
다행히 원곡역 주변에 변전소가 생기면서 22900선로로 바뀌고 심한 빈번했던 정전사고는 줄었다고 한다.
철저한 시공, 백년 바라보다
오 씨는 위험요소가 많았던 한전을 퇴직하고 고잔 신도시 전기공사 감리사로 일했다. 자칫 감리가 허술해지면 부실로 이어짐을 잘 알고 있는 오 씨는 주변에서 깐깐한 감독으로 통한다. 오 씨는 “전기공사는 백년을 보고 하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업체직원과 싸우기도 많이 했다. 다행히 감독 사인이 없으면 일이 진행이 안 되니 감독만 잘 하면 규칙을 어기지 못
한다”고 말했다.
30년 전, 전기가 부족해 변전소에서 멀어지면 불이 붉은 색을 띨 정도였고, 나무로 된 전봇대는 키가 낮은 편이라 자동차가 전선을 끊기도 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산업용전기는 부족함이 없는 큰 공단과 녹지공간으로 자리 잡은 신도시 안산. 그의 소원은 단 하나란다.
“공단이 잘 돌아가 내가 힘써 마련한 전기가 아낌없이 안전하게 사용되길 바란다.”
세월을 뜨개질하며 지켜온 라성시장
‘대림모사’ 백팔중자 씨
“78년7월25일에 이 라성시장에 터를 잡았지요. 그때는 호적도 없던 시절이라 ‘딱지’라는 것을 받고 집이랑 가게를 얻었어요. 가구도 몇 가구가 없었고 동사무소 같은 것도 없었어요. 가게 얻고 몇 년 지나니까 ‘출장소’라는 것이 생기더라고요. 그 후 아파트도 지어지고 건물도 하나둘 올라가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때만 해도 라성시장은 서울의 명동처럼 말도 못하게 번화했어요. 그저 그리운 시절이 돼버렸지만요.”
73세 백팔중자 씨가 회고하는 라성시장의 옛날 풍경이었다. 그녀는 38년 째 ‘대림모사’라는 뜨개 방을 운영하면서 라성시장을 지키고 있는 터주 대감이자 안산 시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장본인 중 한사람이다. 안산 시 승격 30주년을 맞아서 안산 대표 재래시장 라성시장의 어제와 오늘을 살고 있는 백팔중자 씨를 만나서 현 세대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라성의 옛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20평 남짓 대림모사는 38년 전 7평의 작은 가게 ‘대림상회’라는 이름으로 라성시장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뜨개실을 판매하는 곳으로 실을 구매한 손님들에게는 뜨개질을 무료로 가르쳐주는 뜨개 방이다. 그동안 영업해온 세월이 말해주듯이 라성시장 뿐만 아니라 지역 내에서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뜨개 방의 원조 격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가게 안에는 층층이 쌓인 각양각색의 실타래들이 세월처럼 무수히 많았고 편안히 앉아서 뜨개질하는 사람들조차도 오래된 듯 익숙해 보였다. 백팔중사 씨에게 30년 전 기억을 되물었다. 그녀는 “지금은 대형마트가 생기고 택배들이 발전하면서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줄었어요. 더군다나 한꺼번에 재개발이 들어가면서 라성시장 상인들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공장들도 다른 곳으로 많이 이전해나가자 버티다 못한 시장상인들이 하나 둘 라성시장을 떠나고 빈 상자들이 엄청 많아졌어요. 아주 쓸쓸해요. 하지만 나는 아이들 공부도 시켜주고 시집장가도 보내게 해준 라성시장을 아직 못 떠나고 있어요. 이곳 대림모사가 내 인생이고 내 삶 전부예요”라고 말했다.
백팔중자 씨가 추억하는 라성시장과 안산의 옛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백팔중자 씨에 말을 빌리자면 38년 전 안산 일대는 모두 비포장도로였단다. 그녀는 안산 역 비포장 대로변에 꼭 선풍기만한 키 작은 은행나무가 심어지던 때를 회상했다. 그리고 그때 당시 공단 안까지 물이 들어왔던 때를 떠올리면서 거기서 잡은 망둥이를 상인들이 경운기에 싣고 다니며 한통에 천 원씩 팔았던 때를 전했다. 세월과 함께 장사법이 변한 것은 백팔중자 씨도 마찬가지였다. 30년 전 대림모사에서는 실을 일일이 실타래로 감아서 사는 사람이 원하는 만큼 감아서 판매했었다. 그녀는 전했다. “원곡동도 많이 변했어요. 외국인들이 아주 많이 들어왔어요. 지금은 원곡 동을 겁내하는 외부 사람들도 많잖아요.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여기서 늙어간 사람들이라 동네에 대한 애착도 많아요. 그래서 라성시장이 지금처럼 한산해 진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해요.”
고희를 넘긴 백팔중자 씨에게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 것인지 물었다. 그녀는 “나야 임자가 있으면 물려주고 싶지요. 그런데 그동안 모아둔 실이 너무 많아서 가게를 할 임자가 있을지 모르겠어요”라면서 “시 승격 30주년이라고 나 같은 사람 인터뷰도 해주고 기분은 좋네요. 앞으로 시에서 안산에 병원도 떡하니 하나 더 세워주고 라성시장도 좀 들여다봐주고 그럼 더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이런 그녀의 바람은 사실 이곳을 지키는 모든 상인들 마음과 같을 듯하다. 대림모사 뜨개 방에서는 늘 많은 이웃들이 모여 삶의 이야기를 풀었다가 매듭짓기를 반복하면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이 모습이 바로 안산의 어제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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