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교단일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S의 얼굴이었다.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고이자 그곳에 비친 건 그간 나를 지나간 많은 학생들의 얼굴이었다. 바쁜 업무를 핑계로 흘려보냈던 그 모습들을 한번 즘은 아무리 오물거려도 작아지지 않던 눈깔사탕처럼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었고, 희미한 그 향을 소란스럽지 않게 따라가고 싶었다.
S는 순수했다. 호기심도 많아 질문이 많았고, 무언가 옳지 않은 일을 보면 그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착한 심성을 가진 아이였다. 그러나 주변 학생들은 그것을 어리숙하다고 보았고, 수업시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고, 작은 일에도 흥분하는 그 아이의 모습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S가 우리 반이 된 것을 알고 걱정부터 앞선 것을 보면 말이다. 실제로 그간 S가 있던 반은 여러 문제로 학생들이 학생부를 오가는 일이 많았고, 가뜩이나 이제는 고3이라 아이들도 예민한 시기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어쩌나 담임으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최대한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바심을 내며 학기가 지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도 조금은 지쳐가고 있었고, 아이들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S를 따돌리고 있었다. 내가 S를 특별하게 대우해준다는 불만이 그 한 원인임을 알았을 때는 담임으로서 요주의 학생에 대한 방임과 배려, 그 중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40여 명의 학생 모두가 한 가정에서는 소중한 아들들일 텐데, 그 다수의 집합을 누구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평등하게 끌고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한 명을 위해 다수의 일방적인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고3’이라는 아슬아슬한 길을 걷는 아이들에게는 역시나 무리였다.
S가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던 것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요즘과 같은 계절이었나 보다. 주말 자율학습 감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다 길 건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오는 S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 학원이라도 갔다 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기분이 좋은지 연신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멈춰 인사라도 건네려다 그냥 걸음을 옮겼다. 굳이 아는 척하기에는 거리도 멀었고, S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차에 사실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것도 그 솔직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S 뒤로 조금 거리를 두고 걸어가는 S의 어머님이 보였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걸어가는 것일까, 가만히 땅을 보며 걸어가는 어머님의 모습이 어떤 이유에선지 무척이나 작아보였다. 사선으로 떨어진 어깨에 딱히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 모습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S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라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한참 동안 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한 학생에 대해 어머님과 상담하면서 서로 간에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었다. 그 때 수화기 너머 어머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은 아이가 없으셔서 모를 겁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학부모가 교사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졸업식 때 그 어머님께서 찾아와 죄송하다고 말씀 하실 땐 그냥 괜찮다며 웃어 넘겼지만 사실은 그것에 대해서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S와 S의 어머님의 모습을 본 그 때, 급격히 낮아진 수면 위로 생각지 않게 드러난 뭍처럼 그 음성이 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정말 저는 이해할 수가 없겠군요’라는 말이 되돌아 나왔다.
한 번은 S에게 지속적으로 장난을 치는 학생들을 정식으로 처벌하려 한 적이 있었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자꾸 사소한 장난들이 쌓이다보면 그것이 큰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란 생각에 최소한의 행정적 조치로 반 학생들에게 주의를 줄 심산이었다. 조치를 취하기에 앞서 S의 어머님에게 상황을 먼저 말씀을 드렸더니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자신의 아이로 인해 다른 학생들이 처벌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오히려 그 학생들의 편에 서서 말씀하셨다. 차분한 어조였지만 단호했고, 그 말씀의 진심이 느껴져 더는 그것을 진행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이를 괴롭히는 학생을 도리어 감싸는 어머니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수능 시험을 앞두고 아이를 결국 장애아동으로 등록하셨다며 교무실 한 편에서 조용히 흘리시던 눈물을 기억한다. 이 일로 S가 혹 상처받지 않을까하는 안타까움에 서럽게 붉어진 눈자위. 어머님이 아이를 데리고 등록하러 가는 길, 그 마음의 무게를 나는 감히 알 수가 없다.
자꾸 지각을 하는 학생을 꾸중하다가도, 이 아이의 어머님은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아이와의 실랑이에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담배를 피우다 걸린 학생의 철없는 모습보다, 난데없이 학교에 불려와 확인서를 쓰면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어머님의 그 심정을 헤아려본다. 누가 보아도 이 학생의 잘못인데 그래도 자기 아이 편에서 어떻게든 항변하려는 학부모님의 모습은 자기 자식만 아는 이기적인 부모의 마음 같다가도, 자식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세태도 많이 변했다. 교사라고 해서 학생은 물론이고 학부모님들도 교사를 어려워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스승’이란 표현은 지극히 한정적인 단어로 사용된 지 이미 오래인 듯하다. 그러나 교사와 학부모를 나누기에 앞서,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을 공통분모로 그 학생이 바르게 커가길 진심으로 바라는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하여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학생의 바른 성장을 위해 서로가 자신의 자리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소통하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가 가지고 있는 학생에 대한 감정은 색이 다르다. 그러나 어떤 색이든 그것의 빛깔은 그것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것의 다름보다 서로의 색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채워나가길 기대해 본다.
단대부고 김태훈 교사(국어·진로진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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