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인] ‘블루마운틴’ 화가 김인숙

‘그림 짓는 재주’ 배워서 남 주자

지역내일 2015-06-25

마음에 그늘 진 아이들, 결혼이주여성들과 기꺼이 ‘그림 나눔중’인 화가 김인숙. 푸른 산이 트레이드마크가 돼 ‘블루마운틴 작가’란 애칭으로 불리기까지 그는 하얀 캔버스와 면벽 수행하듯 40년 가까이 그림을 그렸다. 이제는 세월이 그에게 선물한 ‘그림의 맛과 멋’을 여럿이 나누며 사람들 마음속에 알록달록 예쁜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송파동에 자리 잡은 작업실은 화가 김인숙의 우직한 그림 인생을 보여준다. 애지중지 아끼는 힘찬 붓 터치의 푸른 산 그림부터 차곡차곡 쌓아놓은 작품을 보며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온 화풍 변화를 생생히 만날 수 있다. “그림은 나의 애인이고 가족이고 친구”라며 작품 한 점  한 점 신나게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윤기가 흐른다. 

열정


블루마운틴 화가가 되기까지 자신과 씨름
 책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 김인숙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달과 6펜스>에서 만난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매력에 푹 빠졌다. 틈틈이 ‘끄적끄적 그렸다’는 그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에 나선 건 20대 후반 늦깎이 미대생이 된 뒤부터다.
 응용미술학과에 진학해 회화, 디자인, 염색, 직조, 금속공예 등 장르 불문하고 기법과 기술을 흡수했다. 졸업 후에는 미술학원을 열었다. 가르치는 사람이 흥이 나니 아이들도 신나게 배웠고 입소문이 나면서 학생 수는 계속 늘었다.
 어느덧 44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어요. 하지만 짬짬이 그리다 보니 목마름이 컸죠.” 미술학원 원장과 전업화가의 갈림길에서 그는 그림을 선택했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원 없이 그렸고 홍대 회화과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본인의 성에 차는 ‘김인숙만의 스타일’을 찾지 못하자 지독하게 방황도 했다. “뭘 그릴 때 가장 행복한지 돌이켜보니 산이라는 대답이 나오더군요.”
 젊은 시절부터 전국의 산을 돌며 스케치 여행을 다녔던 그였다. 현장의 생생한 감흥, 색감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기 위해 계절 불문하고 야외 스케치만 고집했다. 설산 그림에 푹 빠져 살 때는 해발 5400m의 러시아 산에 헬기까지 타고 올랐다. 산소가 부족해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만년설에 반해 쭈그리고 앉아 스케치를 했다. 억척스럽게 산을 다니며 운무에 쌓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도 캔버스에 담았다. 
 서서히 강렬한 붓 터치의 푸른 힘이 느껴지는 ‘블루 마운틴 김인숙 화풍’이 자리를 잡았다. 국내외 개인전, 초대전이 줄을 이었고 중견 화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작품을 활용한 넥타이, 스카프, 우산 같은 아트 상품을 만들어 전국의 아트샵에도 선보였다.


결혼이주여성에게 달아준 ‘그림 날개’
 그림에 빠져 살던 그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뿌리내리고 사는 지역 사회에 눈을 돌리게 된다. 다문화에 관심을 갖고 인하대 교육대학원에서 다문화 관련 박사과정을 밟던 중 재능기부를 자청하며 강동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 문을 두드렸다. 덕분에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세밀화 강좌가 지난해부터 열리게 됐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일본 등 국적도 연령대도 다양한 여성들이 매주 모여 그림을 그려요. 선 긋기 기초부터 1년 넘게 꾸준히 배운 한 수강생은 이제 수준급 실력을 뽐내죠.” 그동안 결혼이주여성들의 작품전시회도 두 차례 열었다.
 “그림을 매개로 격의 없이 친해지다 보면 마음 속 꽁꽁 숨겨둔 이야기가 툭툭 튀어나와요. 아픈 사연도 많지요. 유독 수강생 표정이 어두울 땐 따로 불러 이야기를 들어주지요. 가정폭력으로 힘들어 할 때는 센터에 귀띔해 전문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요. 그동안 다문화 이론을 공부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가 이들에게 관심을 쏟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이미 다문화사회로 접어들었고 ‘그림쟁이’로서 우리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소명 의식 때문이다. “다문화가정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많은데 이 여성들에게 그림으로 마음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평안하고 2세들도 잘 키우죠. 세월이 흐를수록 다문화가정의 문화욕구가 폭발할겁니다. 미리 그 맛을 알려주고 싶었죠.”
 김 화백은 내친 김에 강동구지역아동센터 초등학생들에게도 그림을 가르친다. “부모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가슴에 멍든 아이들이 꽤 많아요. 옆에 앉혀놓고 계속 토닥이죠. 예전에 공부한 미술치료도 요긴하게 사용중입니다.”


 ‘배워서 남 주자’ 세월에서 얻은 지혜
 예순 살 나이에도 꾸준히 전시회 열며 작품 활동하랴 자원봉사에 박사공부까지 틈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는 생기가 넘쳤다. “화가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 예전에 미술학원하며 꼬맹이부터 어르신까지 가르쳐본 경험, 50대 후반에 무모하게 도전한 다문화공부 등 내가 살아낸 세월이 모두 ‘약’이 됩니다. ‘배워서 남 주자’가 60대에 접어든 나의 모토입니다.” 본인의 ‘좋아하는 마음’ 따라 거침없이 사는 그는 역시 아티스트다웠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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