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할 것 없다. 요즘 아빠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딸 바보가 된다. 아빠의 마음속에 딸은 언제나 작은 공주님. 온 몸이 바스러져도 행복하게 지켜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딸들은 알까?
수많은 딸 바보들 가운데서도 동네 대표 네 명을 만났다. 유행하는 말이라 ‘바보’라 부르지만 결코 어리석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이들이다. 딸과 함께 누리는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 어쩌면 말을 바꿔 ‘똑똑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파주 봉일천 원정연씨
명랑한 아빠와 딸, 우리가 바로 붕어빵 부녀
아침은 아빠 담당, 점심은 각자 해결하고 저녁밥은 엄마가 짓는다. 원정연씨의 집에는 전기밥솥이 없다.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누룽지 좋아하는 식구들을 위해 가스레인지에 냄비 밥을 하는 아빠 원정연씨. 그는 남다른 정성으로 딸 진주(20)씨와 아들 동성(16)군을 길렀다.
봉사하는 아빠의 뒷모습 보고 자란 딸
아빠 원씨의 가슴팍에는 25cm의 흉터가 있다. 어릴 때 심장판막증으로 수술한 흔적이다.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난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은 심장 건강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건강했다.
아빠 원씨는 ‘생명을 다시 얻어 산다’는 고마움에 어린이 심장병 환우 생일잔치와 교회 주일학교 봉사를 13년 동안이나 해왔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 신문기자 일을 접고 헤이리에 테마가 있는 체험미술관 뚜비아트아띠를 열었다. 진주씨는 신나게 일하고 봉사하는 아빠를 지켜보며 자란 딸이다. 열두 살 때부터는 아빠를 따라다니며 음향 진행을 도왔다. 운동회, 마술쇼, 동화 구연 등 아빠 눈빛만 보고도 척척 알아서 할 만큼 호흡도 잘 맞는다.
아빠는 나의 멘토
아빠를 꼭 닮아 긍정적인 성품에 생글생글한 표정이 인상적인 진주씨는 올해 치른 입시에서관광경영학과에 수시 전형으로 합격 했다. 어릴 때부터 꿈꿔오던 일이라 기쁨이 더했다. 진주씨는 “대학 합격의 반은 아빠 덕분”이라고 말하곤 한다. 또 “아빠는 제가 많은 경험을 하도록 기회를 주셔서 스스로 강해질 수 있었고 어딜 가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빠는 제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멘토”라고 말했다.
성년이 된 딸과 소통하기 위해 아빠는 여전히 소소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틈날 때면 둘이서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떠나고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삼겹살을 먹는다. 명랑한 아빠에 밝고 바르게 자란 딸. 이들이 바로 붕어빵 부녀다.
일산동구 성석동 권오성씨
“두 딸 함께 키울 전원주택 마을 만들었죠”
성석동 산 아래 작은 전원주택 단지 ‘야호마을’.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같이 다닌 다섯 집이 모여 만든 공동체 마을이다. 이곳에 둥지를 튼 권오성씨는 하윤(8), 의윤(4) 두 딸의 아빠다. 부지를 수소문하고 집을 짓기 까지 쉽지 않았지만 두 딸을 행복하게 키울 이웃을 만들어 준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다.
당연히 딸이라 믿은 아빠
권씨가 집을 지을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뜻밖에 욕실이다. 식구 넷 중에 여자가 셋, 두 딸이 자라면 씻고 몸단장할 공간이 넓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의 2층에는 커다란 욕조를 놓고 파우더 룸도 넉넉히 지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지만 어느새 품 안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는 권씨. 큰 딸 하윤이가 벌써 8살이 돼서 함께 목욕을 할 수 없게 돼 서운하기만 하단다.
“나중에 자라면 더하겠죠. 쇼핑할 때도 저는 아예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어디 혼자 앉아있겠죠. 백화점 갔더니 아빠 혼자 스마트 폰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나도 저러고 있겠구나…”
지금 이 순간 딸들이 있어 행복해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려고 한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도 “당연히 딸을 낳을 것이며 딸이 아닌 아이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못 말리는 딸 바보 아빠. 두세 시간 만에 깨는 아이를 돌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직업이 한의사면서도 아이가 아프면 허둥대느라 이성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때가 많았단다.
전형적인 딸 바보의 증세 아니냐고 묻는 리포터에게 권씨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딸 낳기를 잘했어요. 아이인데도 챙겨주는 게 있거든요. 얼마 전에 맛있는 반찬을 해주니까 아빠 먹게 남겨놔야 한다고 했대요. 또 학교에서 만든 부채에는 아빠가 좋다고 적었대요.”
두 딸 키우는 아빠만의 자랑, 일상에 스며든 딸들의 잔잔한 사랑에 대한 자부심이다.
덕양구 화정동 엄광진씨
아빠와 딸은 여행 단짝
밤늦게 일이 끝나도 개봉한 영화는 꼭 챙겨 봐야 한다는 엄광진씨는 1인 기업으로 일을 하며 색소폰 연주가 취미다. 지인들은 그를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른다.
엄씨의 딸 엄지원(16)양은 올해 중3이다. 남들은 사춘기로 부모와 대립각을 세울 법한 시기지만 이들 부녀에게는 그야말로 남의 일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둘도 없는 여행 단짝이기 때문이다.
경주 포항 찍고 강원도까지 2박 3일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아빠랑 갔던 여행에서 딸은 의외로 잘 따라왔다. 경주로 갔다가 포항을 들러 7번 국도를 타고 강릉 삼척까지 2박 3일을 함께 지내니 사이도 돈독한 부녀가 됐다.
아이에게 특별히 뭘 가르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니 “저기가 아빠랑 내가 갔다 온 곳이구나. 불국사도 가봤지. 석굴암도 괜찮았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여행이 주는 게 그런 건가 보다’ 짐작만 할 뿐이다.
재작년에는 KTX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시티투어 코스를 돌았다. 국제시장 깡통시장, 해운대, 송정해수욕장을 거쳐 영도까지 2박 3일을 다녀왔다. 고등학생이 되면 여행할 일이 줄어들 것 같아 올 초에는 캄보디아 여행을 제안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떠난 길, 딸은 기대 이상으로 여행을 즐겼다.
캄보디아로 시작한 아시아 여행
올 여름 부녀는 일본에 갈 예정이다. 너무 더우면 북경에 갈 수도 있다. 진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좋으면 겨울방학에 또 떠날지 모른다. 사진 찍는 거 싫어하고 외모에 관심 많은 여중생 지원이. 하지만 사춘기라 겪는 갈등은 별로 없다. 가끔 안 부리던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 정도. 요즘 부녀의 대화 주제는 진학 문제다. 아빠는 늘 그랬듯 강요보다는 제안하고 딸에게 마지막 결정을 맡기려 한다.
엄광진씨는 “딸 바보라 느낀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매 순간이 그렇다”고 답했다.
“딸이라는 존재는 그냥 좋아요. 어려서부터 딸이 저한테 주는 행복감이 있잖아요. 결혼식장에 가면 엄마보다 아빠들이 더 슬퍼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중 일이긴 하지만 결혼하면 서운할 것 같아요. 진짜로.”
정발산동 이현택씨
“딸의 결혼식, 인생 숙제한 기분이죠”
고이 기른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은 어떨까. 이현택씨는 지난 4월에 딸 이윤지(30)씨의 혼례를 치르고 “숙제 한 가지 한 것 같아서 후련하다”고 말했다. 남녀 간에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은 누구한테 주고받고 뺏어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축하하고 격려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딸의 결혼 섭섭하지 않아요”
“서운하긴 뭘 서운해요. 늘 같이 만나 토론하고 얼굴 보는데.”
이현택씨는 딸 부부가 꾸려갈 삶의 모습이 궁금하고 기대가 된단다. 먼저 가정을 꾸리고 살아 본 인생 선배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우리가 집안 살림 장만할 때 옛날에는 싸면 경제적이라 좋다고 생각했죠. 살아보니 물건 하나를 고르더라도 질을 보고 따져야겠더라고요.”
딸에게 20~30년 쓸 좋은 물건을 사라고 말하는 이유다. 사치품을 사라는 게 아니라 긴 세월이 지나도 효용 가치가 있는 것을 잘 고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려하고 존중하는 부부로 살아가길
부부 사이에는 서로 배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사랑해서 선택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존심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어요. 상대방 입장에서 배려하고 존중하라고 강조해요.”
아버지를 따라 의사로 자란 딸. 남들은 잘 키운 딸이라고 하지만 이현택씨는 “내가 키우기 보다는 잘 대화한 것이 전부”라고 손사래를 친다. 억지로 끌고 가기 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이 그의 교육법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이들 문제로 크게 고민할 일이 없었다.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겨 악기를 가르쳤고 장성한 지금도 자녀들과 모이면 작은 연주회를 즐긴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집에서 생활하는지 부모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도 닮아가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현택씨. 사랑과 믿음으로 딸을 키운 아빠의 담담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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