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막내딸을 데리고 아빠는 잠실복지관 장애인 나들이 돕기 봉사길에 올랐다. 붙임성 좋고 싹싹한 꼬마는 고사리 손으로 휠체어를 밀고 생글생글 웃으며 간식을 나르면서 어른들과 금방 친해져 한강공원, 수목원... 매달 나들이 갈 때마다 동행하는 마스코트가 됐다.
그러던 중 미애아줌마를 만났다. 고교 영어교사였던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반신불구가 됐고 절망의 나락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늘 화내고 남과 어울리지 못하던 아줌마가 꼬맹이한테만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아줌마의 전담 휠체어 담당이 된 뒤로 둘은 찰떡궁합의 파트너가 됐다. 봉사의 인연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다.
‘1000명이 뽑아준 사람’ 격려 편지 받고 힘내다
여섯 살 꼬마가 바로 이윤지양이다. 그를 만나기 전 “친구들 사이에 신망이 두텁다”라는 언질을 정신여고 교사에게 들은 터였다. 눈빛과 웃음이 말간 이양과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보드라운 쿠션, 흡수력 좋은 스펀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지난 1년간 정신여고 학생회장으로 동분서주하며 보냈다. 덕분에 리더십의 뿌리는 단단해지고 마음 씀씀이도 넓어졌다.
사실 출마를 결심한 건 그의 따스한 품성을 눈여겨 본 담임선생님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 “막상 당선되고 나니 덜컥 겁이 났어요. 성적도 스펙도 두드러지지 않는 내가 전교생을 대표하는 회장감일까?” 밤잠까지 설칠 만큼 걱정, 불안이 엄습했고 자신감도 덩달아 곤두박질쳤다. 그의 심적 갈등을 눈치 챈 학생회장 출신 선배가 편지를 보내왔다. ‘1000명의 아이들이 뽑아 준거야. 너는 그 아이의 선택과 지지를 받은 사람이니까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학생회 일에만 전념하면 돼’라는 격려의 글귀가 눈물을 쏟게 할 만큼 그의 가슴에 짜릿하게 와 닿았고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학생회는 입학식과 졸업식, 임원수련회, 각종 교내 캠페인, 스승의 날 행사, 축제 등 교내의 크고 작은 행사를 주도적으로 치러야하기 때문에 부원 간 팀워크가 중요하다.
“회장 임기 1년을 봉사의 시간으로 생각했어요. 시간과 품이 많이 들어 부원 모두가 꺼리는 일을 내가 도맡아서 하자는 원칙을 세워 실천했지요. 개성이 강한 11명의 부원들이 하나로 똘똘 뭉쳤고 모든 프로젝트를 잡음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어요.” 그에게 학생회는 행사 기획과 진행부터 허드렛일까지 여기에다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며 최적의 방안을 모색해 나가는 팀워크를 몸으로 배울 수 있는 학교 안 또 다른 사회 조직이었다.
‘궂은일은 내가 먼저’ 원칙으로 팀워크 다져
“책임감, 리더십을 단련시킨 1년이었어요. 특히 남 보다 한발 앞서가며 남을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 밑에서 받혀주는 내 방식의 리더도 가치롭다는 걸 배운 고마운 시간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나의 모든 걸 쏟아 부으며 몰두해본 경험 그 자체가 내겐 무척 소중합니다. 덕분에 많이 성장도 했고요”라고 이양은 어른스럽게 말한다.
특히 탈북자 대안학교인 하늘꿈학교 학생들과의 교류는 그에게 세상을 넓고 깊게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또래 탈북학생들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첫 만남을 가진 후 요리경연대회, 소풍, 영화 관람 같은 행사를 진행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갔어요. 솔직히 그 전까지는 통일을 고민해 본적도 없고 국가가 알아서 해야 할 영역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을 만나며 통일의 이유를 가슴으로 이해했어요. ‘내가 북한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잖아’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탈북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없앨 수 있었고요.”
이처럼 이양은 활동에서 얻은 깨달음을 교과서 속 지식과 연결시키며 앎과 실천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역사동아리 활동 역시 같은 맥락이다, “큐레이터, 사학자를 꿈꾸는 친구들과 우연히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우리 역사를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었어요. 고종에 대한 역사 왜곡을 주제로 덕수궁, 시청 앞에서 거리 캠페인을 벌일 때는 길 가던 분들이 기대 이상으로 호응해 보내셨지요.”
이런 활동을 통해 우리의 역사 지식이 겉핥기식이며 깊이가 없다는 한계도 절절히 깨닫게 됐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여성독립운동가로 김필례, 방순희 등 숱한 분들이 계신데 사실 상당수가 유관순 외에는 잘 몰라요. ‘있었던 사실을 묻어버리는 것도 역사 왜곡’이라는 한 사학자의 뼈 있는 한마디를 들으며 반성을 했습니다.”
“내 꿈은 정신여고 국어선생님”
고교 생활의 퍼즐 조각을 알차게 끼우며 활기차게 사는 그의 장래 꿈은 교사. “초등학교 때는 막연히 선생님들 꿈꾸었다면 중학생이 된 뒤로는 국어교사를 그리고 지금은 정신여고 국어교사로 구체화됐어요(웃음). 학교 생활 내내 ‘365일 땡큐’의 느낌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거든요. 내 도움으로 상대방이 변해가는 걸 보는 과정이 행복하기 때문에 꼭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라고 활짝 웃으며 그는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학생회 활동 때문에 소홀했던 책을 펴며 하강곡선을 그린 성적을 반전시키기 위해 자신과의 독한 싸움에 돌입했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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