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성 안쪽에 있다고 해서 성안마을로 불렸던 곳, 강동구 성내동이다. 단독주택, 빌라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조용한 주택가가 2년 전부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웹툰 작가 강풀의 순정만화시리즈를 벽화로 재현한 강풀 만화거리를 강동구가 만들고 난 후부터다. ‘토성에 앉은 승룡이’, ‘파란목도리’.... 같은 52편의 벽화가 외지인들을 조용히 불러 모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보라색 간판에 ‘강동팟’이란 알쏭달쏭한 이름을 단 이색 공간이 마을 초입에 생겼다.
‘강동 키드’들이 만든 동네 아지트
“전기 스파크의 ‘파박’처럼 찌릿한 느낌, ‘담다’라는 의미를 지닌 주전자(pot), 제주도 사투리로는 공간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닌 아지트입니다”라고 스스로를 팟지기로 소개하는 이진영(32세)씨가 말한다.
팟지기는 모두 세 명. 30대의 문지선, 40대 우선택씨까지 삼총사가 주축이 돼 만든 공간이다. 강동에서 초중고를 다니며 ‘강동 키드’로 커 동네에 애정을 듬뿍 안고 사는 ‘마을 청년들’이다.
10여 평 공간은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 책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 켠에는 씽크대, 조리대, 냉장고 같은 주방시설까지 갖췄다.
“공간의 뿌리를 찾자면 2012년 시작한 ‘청춘들의 대나무 숲’이라는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인문학 강좌 모임으로 사주명리학, 정약용 실학사상을 스터디하며 답사 다니고 영화 본 후 토론도 벌였지요. 가끔씩 팥빙수를 만들고 삼계탕도 끓여 나눠먹기도 하면서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에너지를 나눌 공간이 필요하더군요.”
어르신을 위한 노인정,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 여성들을 위한 문화센터처럼 마을사람들이 사랑방처럼 머물다 갈 수 있는 청년들이 운영하는 아지트가 강남팟의 정체다.
사실 세 사람은 강동구의 60여개에 달하는 마을사업을 물신양면으로 돕던 베테랑 마을기획자 출신이다. 강동팟에 상근하는 이씨는 사회학을 전공한 뒤 희망제작소를 거쳐 강동구사회적경제지원센터, 강동구마을공동체지원실에서 일하면서 숱한 협동조합, 마을공동체, 마을기업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수년째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 구상했던 마을사업의 판을 직접 벌이고 싶어지더군요. 지인들에게 소셜 펀딩 받아 공간을 빌리고 실내 인테리어도 우리 손으로 직접 다 했습니다”
1인 가구 밥 함께 먹는 저녁밥상모임 열어
우선 소소한 생활정보부터 인문학까지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누구나 학교’를 준비했다. 첫 강의로 ‘내 팔자는 내가 풀자’란 제목의 왕초보 사주명리학교실을 열어 음양오행, 천간과 지간을 통해 본 운명, 인물로 살펴보는 팔자를 여럿이 함께 배웠다..
성내동, 천호동 일대에 1인 가구가 많은 지역 특성을 살려 저녁밥 함께 먹는 밥상모임도 게릴라 이벤트처럼 열고 있다.
“공간을 꾸밀 때 주방에 공을 많이 들였어요. 밥을 같이 먹다보면 낯선 이들끼리 쉽게 친해지잖아요. 우리가 그동안 진행한 밥상모임은 집에서 먹던 반찬 아무거나 1가지씩 가지고 와서 밥을 함께 먹는 겁니다. 열 명쯤 모이더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렇게 밥을 인연으로 자꾸 만나다보면 고민도, 재능도 나누며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기겠지요”라고 이씨는 말한다. 청년밥상모임은 3월부터 정기적으로 열 예정이다.
강풀만화거리의 ‘다목적 공간’
2월부터는 토요일 오후 2시부터 ‘골목의 오후’란 콘서트를 연다. 강풀만화거리로 구경 오는 외지인들은 늘고 있는데 성내동에는 벽화 구경 외에 딱히 즐길 거리가 없다는 데 착안, 강동팟에 모여 앉아 차 한잔 나누며 공연도 감상할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한 거다.
모임 장소가 필요한 주민들에게는 저렴하게 대관도 하고 있다. 이처럼 강동팟은 ‘다목적 공간’으로서 입지를 계속 넓혀가는 중이다.
“현재는 문턱 낮추는 작업을 하는 중이에요. 우리끼리 프로그램 기획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방식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함께 해보고 싶은 것이 뭔지를 계속 탐색중이지요. 우리가 야단스럽게 홍보하지 않아도 간판 내걸고 있으니까 동네 분들이 먼저 궁금해 하며 문 열고 들어와 이것저것 물어보세요. 그럼 우리도 그분들이 하고 싶은 걸 물어 칠판에 쭉 적어 놓지요. 수공예 강좌, 기타 배우기, 함께 영화 보기 등 많은 의견이 쏟아져 나왔어요. 앞으로 테마 별로 묶어 하나씩 해나갈 겁니다. 강동팟을 통해 많은 소모임들이 만들어지고 확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목표지요.” 마을 안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친 청년들은 느긋하게 답한다.
한참을 이야기 듣다보니 ‘당장의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에 한창 돈을 벌어야 할 나이의 청년들이 뛰어든 이유가 궁금했다. “꼭 해보고 싶어서요. 지금 안하면 훗날 후회할 듯싶어서요”란 담백한 답이 돌아왔다.
www.facebook.com/gdpodazit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