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문해교육 ‘은빛생각교실’ 스케치

배움에 나이가 상관있나요? 열정과 성실은 젊은이들 앞서가요!

지역내일 2015-01-08

읽고 쓰기 편한 한글의 우수성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낮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시절을 거쳐 온 어르신세대, 그 중 여성들의 문맹률은 전체수준에 비해 높은 편이다. 성인문해교육이란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다. 글을 몰라 답답하고 부끄러운 마음조차 쉬 드러내지 못했던 이들이 ‘은빛생각교실’에서 뒤늦게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한다고 해 찾아가 보았다.
정선숙 리포터 choung2000@hammail.net

종강식


예상치 못했던 뜨거운 반응
머리가 희끗희끗한 학생들도, 학생보다 젊은 선생님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오늘은 은빛생각교실의 종강식이 있는 날. 그동안 두 개 반으로 나뉘어 수업하던 할머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할머니 한 분이 앞으로 나가 강사가 살짝 보여주는 단어를 읽고 마임으로 설명을 하면 나머지는 그 단어를 맞추는 게임을 하면서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한다. 2013년에 문을 연 ‘은빛생각교실’은 영등포구 내 비문해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육 프로그램이다. 전국학술세미나와 대한민국 평생학습박람회 등에 우수프로그램으로 소개돼 사례를 발표했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애 강사는 글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읽지 못한다는 불편함을 넘어 주어진 혜택을 누릴 수 없는 불평등과 일상생활의 구속이라고 말한다.
“일례로 그동안 안내표지판을 읽지 못해 공짜지하철을 한 번도 타보지 못한 분도 계셨고, 고향이 목포이신 한 할머니는 터미널에서 목포행 표를 끊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버스 탈 때까지 그 사람만 따라다니셨다고 해요. 지금도 다양한 복지혜택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몰라 국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은 다 하고도 권리는 전혀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재미를 붙인 할머니들은 아프거나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결석하는 일이 거의 없다. 비가 쏟아지면 배낭에 여벌옷을 챙기고, 눈 내릴 땐 행여 넘어질세라 신발 바닥에 쇠 수세미를 감고 와 수업에 참여하는가 하면, 관절이 좋지 않아 구부러진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글씨를 쓰는 학생도 있다.
영등포구청 교육지원과 이영은 평생학습팀장은 “2013년 처음 은빛생각교실을 열었을 때 예상치 못한 뜨거운 반응에 적잖이 놀랐다”며 “지금도 대기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 내년에는 교실숫자를 늘리고 영어교실도 함께 운영할 계획이다”고 전했다.


운동회와 수학여행이 소원
학창시절 수학여행과 소풍, 운동회 등은 으뜸가는 추억이었다. 은빛생각교실에서는 할머니들 47명과 자원봉사자 10명, 간호사까지 섭외해 봉평 메밀밭으로 소풍을 다녀왔다. 강사들이 준비한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함께 여행했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할머니들은 이제 운동회와 수학여행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입을 모은다. 강사들이 고민해 바자회나 서점나들이 등의 프로그램으로 대처하고 있지만 할머니들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했는지, 종강식에서 한 할머니는 죽기 전에 수학여행 보내달라고 말해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이영은 팀장은 “경비와 안전문제로 인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지만 언젠가 할머니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애써보겠다”고 말했다.

강사들과 자원봉사자들


어른신들 마음까지 세심하게 살펴요
은빛생각교실의 특징은 대부분 귀가 어두운 학생들을 위해 유난히 큰소리로 가르치는 강사들과 여기저기 질문하는 학생들 자리로 달려가 꼼꼼히 봐주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애 강사는 “어르신들 문해교육은 봉사정신이 없으면 지속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 일을 하다보면 어머님들의 필요가 눈에 보입니다”라며 “치매검사가 무료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 속상해 하던 차 치매지원센타와 협력해 어머님들 모두 검사를 받게 해 드렸답니다”라고 전한다.
은빛생각교실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한 맞춤교재를 펴냈다. 문해강사들이 모여 연구한 끝에 만든 초등과정 성인문해교과서인 ‘소망의 나무’ ‘배움의 나무’ ‘지혜의 나무’ 등은 눈이 어두운 어르신들을 위해 큰 글자로 제작했고, 실생활에 적합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영등포구와 함께 성인문해교육용 영어교재인 ‘보이는 잉글리쉬’를 펴냈고 내년에는 ‘말하는 잉글리쉬’도 출판할 계획이다.
자원봉사자 이희숙씨는 종강식을 마치고 난 뒤 할머니들이 앉으셨던 자리를 정리하며 얼마 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교육을 넘어 어르신들과 소통하며 마음까지 세심히 살피는 강사들과 자원봉사자들. 이들이 있어 2015년 한해도 배움의 열기와 즐거움 가득한 은빛생각교실이 되리라 기대한다.
은빛생각교실 교육문의 : 영등포구 교육지원과(☎ 02-2670-4173)


이미애 강사
15년째 성인문해교육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하나를 가르쳐드리면 둘을 잊어버리는 어머님들로 인해 차라리 녹음기를 틀어놓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쌓아온 어머님들의 삶의 지혜는 배운 자들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먼저 배운 분들이 처음 배운 분들을 찾아가 도와주는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도입했는데, 이분들이 단짝으로 지내는 모습 보면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차금순 할머니(73세)
먼저 배운 사촌동생이 돈 안내고 공부할 수 있다고 알려줬지요. 창피한 생각에 2년 가까이 망설이다 딸이 적극 권하기에 용기를 냈어요. 길 다닐 때 간판을 읽을 수 있어 뿌듯하답니다. 한글에 재미를 붙이니 영어도 욕심이 나 배우고 있어요. 손자에게 엽서도 보냈고 얼마 전 ‘남진쇼’에 가서 ‘G21’번 자리를 스스로 찾아 앉았습니다. 종강하는 날 우수상까지 타니 기분이 더 좋네요.


이복순 할머니(77세)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가 자랑을 했었어요. 그냥 스쳐 들었다가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한 뒤 용기를 내 전화를 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 힘들지만 항상 앞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제천에서 열린 평생학습축제 때 전국 학습자 중 가장 예쁜 글씨로 한국문해교육 협회장상까지 받았답니다.


박옥화 할머니(70세)
선생님과 동기들 볼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 사랑전도사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충청도 서산 섬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 제대로 배우질 못해 내 이름도 못썼는데 이젠 아쉬운 게 없어요. 더 열심히 공부해 앞으로 이미애 선생님같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적극 추천해 준 남편이 정말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이금례 할머니(62세)
글을 몰라 답답해하던 차 큰딸의 추천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직 맞춤법을 완벽히 쓰지는 못하지만 전국 문해 한마당 글쓰기 대회에서 ‘정우야 정우야’라는 시를 써 교육부장관상을 받았어요. 정우는 제 손자인데 정말 사랑스럽고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답니다. 정우가 나중에 커서 할머니를 자랑스러워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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