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그 근원의 질문.
프랑스 바깔로레아 논술 고사 중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논술하되 2명 이상의 사상가의 근거를 들어 서술하라’는 문제가 출제된 적 있었다. 상당한 철학적 수준이 되어야 논의할 수 있는 문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과연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확신이 서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쳐다보는 자아가 또 있어야 하는데 그 자아 또한 객관적 존재가 아니므로 그를 쳐다보는 자아가 또 필요하다. 다소 어렵지만 ‘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살피는 나’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살피는 나’ 또한 정확하게 드러나야 하므로 ‘그 살피는 나를 살피기 위한 나’가 또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면 결국은 나를 살피는 작업은 불가능해진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무한후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넌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해 주면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결국 타자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는 방식이나 태도에 따라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심해질 경우 진정한 ‘나’를 버릴 수가 있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갖는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본래적 자아만 있거나 완벽한 사회적 자아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방향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나 행복은 매우 다르게 결정된다.
‘그’가 아니라 ‘너’가 인정해 주는 자아가 참된 자아
실존주의에서는 타자와의 관계를 모두 단절하고 절대 고독의 상태에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 가장 온전한 실존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실존적 자아를 찾는다면야 매우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와 단절된 단독자로서의 자아를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타자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 타자가 누구냐에 따라 자아는 달라진다. 타자는 크게 ‘너’와 ‘그’로 분류된다.
우선 ‘그’는 교체되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대상들이다. 식당의 고객, 직장 상사, 동호회 회원 등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도 크게 심각한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일 뿐이다. 흔히 권위적인 상사는 부하직원을 ‘아랫것’이라는 호칭을 쓰는데 이 정도라면 그 부하 직원은 ‘그’일뿐만 아니라 ‘그것’의 수준이 되고 만다. 반대로 사람들은 ‘너’가 아닌 ‘그것’이 되고 싶을 때도 있다. 수인 번호로 불리워지는 교도소의 죄수들이 그렇다. 최근 교도소에서 수인 번호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정책을 실현하고 있다는데 별로 달갑지 않은 제도다. 교도소 죄수의 입장은 자기 실명을 부를 경우 자아를 죄수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 자존감을 상실하기 때문에 교화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절도 사기범 2135호’라고 불리워지면 ‘2135호’는 형이 끝나는 순간 실제 자기는 더 이상 절도 사기범이 아닐 수 있다는 사고를 갖게 한다.
한편 ‘너’는 절대 교체될 수 없는 관계다. 교체될 경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는 관계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가 새롭게 맞이한 부인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자식의 심정은 절대 교체될 수 없었던 ‘그’가 아닌 ‘너’의 어머니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아주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등을 돌리는 경우 그는 ‘너’에서 ‘그’가 되고 만다. 자신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친구라도 끝까지 그를 믿고 인정해 준다면 그 친구는 ‘너’다. ‘그’가 아무리 많아도 ‘너’가 별로 없는 사람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이지만 ‘너’가 별로 없는 사람은 수많은 ‘그’를 만들어 허상의 자아로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의 근원적 고독은 그러한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성형 수술은 수많은 ‘그’를 향한 허상의 자아 만들기에 불과하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성형 수술이 얼마나 헛한 일에 불과한지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질병이나 사고 또는 선천적 기형인 사람의 성형 수술은 자기를 향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모를 꾸미기 위한 수술은 결코 ‘너’를 향한 것은 아니다. 어느 누가 부모를 위해서 성형 수술을 할까. 결국 성형 수술은 수 많은 ‘그’를 향해 있다. 그 결과 진정한 ‘나’,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본래적인 ‘나’와 점차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혹자는 성형 수술을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신감은 진정 나와 교체 불가의 관계를 유지하였던 ‘너’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그’에게서 얻는 허상의 자신감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정한 관계인 ‘너’를 속이고 헛한 ‘그’에게서 얻는 자신감이기에 강한 열등의식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양적인 확장만 있는 ‘그’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성형 수술은 진정한 자아를 만나기가 어려운 헛한 만족감에 불과하다. 수많은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보다 영원한 관계인 ‘너’에게 매력적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다음 주에는 ‘외모지상주의를 극복하는 철학적 사유 2’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이성구 선생
이성구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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