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향해 무한 질주하던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높이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과 지혜를 안겨주는 인문학.
그동안 ‘인문학 살리기’가 주로 강좌 중심으로 진행돼 왔던 것을 비춰볼 때, 지난 5월 28일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서 열린 ‘야(夜)한 토론회’는 차별화 된 인문학 행사의 자리였다. 주민들 스스로 책을 매개로 삶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토론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김수정 리포터 whonice@naver.com
“책은 화두를 제공하고 사라져버려야 합니다. 책을 매개로 우리를 얘기해야 합니다. 논쟁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며 힐링이 되는 자리가 됩시다.”
파주시 ‘야(夜)한 토론회 현장. 이날의 진행자로 나선 유범상 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가 참석자들을 향해 강단에 섰다.
“자, 토론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 따라합시다! 상대방을 존중합니다. 경청합니다. 솔직하게 얘기합니다. 차이를 인정합니다.”
유 교수의 선창에 참석자들이 힘차게 따라 외쳤다. 그리고 박수와 함께 시작된 본격적인 토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10여 명씩 조를 이뤄 원탁에 둘러앉았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서부터 중장년층, 대학생, 청소년 등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이날의 토론 주제는 힐링과 소통. ‘푸른 눈 갈색 눈(윌리암 피터스)’과 ‘까매서 안 더워(박채란)’란 2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시간으로 진행됐다. 이날 이곳에 자리한 참석자들은 나이와 직업의 벽을 넘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내놓는 모습들을 보였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진행된 이날의 토론회는 늦은 저녁부터 밤10시까지 이어졌다.
나이와 직업의 벽 허물고 책을 매개로 토론 벌여
파주시 ‘야(夜)한 토론회’는 파주시가 지난 2012년, 책 읽고 토론하는 도시문화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공개토론회이다. 매회, 책을 선정해 주제를 두고 테이블 위에서 토론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관내 독서동아리는 물론이고 파주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지고 있다. ‘야한 토론회’ 첫 회부터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유범상 교수가 토론의 멘토링과 진행을 담당해오고 있다.
‘야한 토론회’는 통상적인 ‘인문학 살리기’의 프로그램과는 차별된 모습을 띠고 있다. 기존에 많이 볼 수 있었던 인문학 프로그램이 강사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내놓는 강좌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야한 토론회는 사람들이 직접 참여해 책을 매개로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 꺼내놓고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유범상 교수는 “강좌중심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개인의 교양 수준은 높아질지 모르나 개인이 자발적으로 인문학적 삶을 실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며 “야한 토론회는 교양으로서의 인문학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매개로 만나 현실을 토론하며 나와 공동체를 둘러보고 변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곳 토론회의 책과 주제도 우리 삶과 무관한 것보다는 우리 삶과 사회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들로 구성하고 있다.
야한 토론회는 세대와 직업의 장벽을 넘어 토론을 벌이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야한 토론회를 처음 찾았다는 고재은(42)씨는 “만약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대화의 장벽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과도 원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열리고 좋은 토론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학생들과 이곳을 찾은 파주시 탄현중 김경순 교사는 “토론의 기회가 적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세대와의 토론은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매해 열리고 있는 파주시 야한 토론회는 올해 하반기에도 한차례 더 진행될 예정이다.
>>> 야한 토론회를 찾은 사람들
“가슴 뿌듯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파주시 중앙도서관 ‘책 그리고’ 독서동아리에서 왔습니다. 저는 야한 토론회 첫해부터 참여해 왔는데요. 매년 새로운 분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어 뿌듯한 마음입니다. 야한 토론회를 통해 지역 사회의 다양한 분들과 사회 각 분야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요. 앞으로 책 읽고 토론하는 문화가 파주 뿐 아니라 인근지역까지 더욱 확산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유윤열(33)씨
“낯선 분들과도 열린 마음으로 토론할 수 있었어요”
물푸레도서관의 ‘공감42’ 독서동아리에서 왔어요. 야한 토론회는 이번이 처음인데요. 다양한 연령대와 처지의 사람들과 토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문화였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유범석 교수님이 토론의 가이드라인을 잘 제시해주셔서 낯선 분들과도 열린 마음으로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 온 독서모임 회원 몇 분들도 다음에는 아이들도 데리고 와 엄마가 토론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네요.
- 고재은(42)씨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과 왔어요”
이번 야한 토론회는 이전에 비해 학생들의 참여가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파주시 탄현중학교에서는 김경순 교사와 학생들(이은지, 황시내, 이예지, 박서현)이, 파주시 한빛중학교에서는 신기석 교사와 책수다 독서동아리 학생들(김관모, 이현중, 김현진, 양진수)이 토론회를 찾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에요.”
- 황시내(16)양
“평소 이야기해 보지 못했던 대상과 나이의 벽을 허물고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경험이 새로웠어요.”
- 김현진(16)군
“우리나라에서는 어른들만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끼지 말라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곳에선 다 같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어요.”
- 양진수(14)군
“서로를 존중해주면서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분위기여서 부담이 없었어요.”
- 이현중(14)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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