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시에 사는 김성묵 씨는 지난 4월 16일 침몰하는 세월호에 있었습니다. 제주도로 출장을 가는 길이었죠. 기울어져가는 배에서 김 씨는 끝까지 학생들을 끌어내고 어린아이를 안아 올리다가 마지막 구조선을 타고 세월호를 탈출했습니다.
현재 고대안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그를 리포터는 우연히 3번 만났습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창문을 부수고 아이들을 더 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어깨를 안마해주며 ‘수고했어요’
지난 17일 새벽 2시. 리포터는 고대안산병원 8층 휴게실에서 늦은 시간에도 잠들지 못하는 김성묵(37·시흥) 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김 씨는 사고 당시 세월호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한 건강한 청년이었습니다. 20명이 넘는 학생들을 기울어져가는 배에서 끌어내고, 5세 여아도 안아 올린 김 씨는 마지막 구조선을 타고 세월호를 빠져 나왔습니다.
아이들을 구조하는 김 씨의 모습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자 휴게실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김 씨의 어깨를 안마하며 격려했습니다.
일주일 사이 ‘야위었네요’
일주일 뒤인 지난 25일 병원 1층에서 우연히 김 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던 날, 고등학생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어려보이고 건강했던 모습이 일주일 사이 많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야윈 까닭을 조심스레 묻자 “사실은 잠들기도 먹기도 좀 힘이 들다”고 했습니다. 그는 입원한 학생들을 걱정하며 “마음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아이들에게 밝은 기운이 전해져야 한다”며 “아이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미처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아이들을 기억합니다. 그것이 가슴에 남아 병원에 있는 아이들이라도 도와야 버틸 것 같다”고 합니다.
세 번째 김성묵 씨를 만나던 날 인터뷰를 했습니다. “친구와 선생님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웃어야 나도 웃을 수 있다는 그. 다음은 성묵 씨와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세월호가 언제부터 이상했는지?
“15일 밤 잠들기 전에 ‘휘청’하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작은 배가 큰 파도에 흔들리는 정도. 큰 배를 처음 타보는 입장이라 ‘어 놀랐다!’ 정도로 그냥 넘겼다. 약 2~3분 후에 균형이 잡혀 어떤 큰 조짐을 깨닫지 못했다.”
사고가 나던 날 아침 상황은?
“16일 오전 8시30분~9시쯤 아침을 먹고, 4층 외부 복도에 있는데 미끄러지듯 배가 기울고 ‘쿵’ 소리가 났다. ‘위험할 수 있으니 움직이지 마라’는 방송을 듣고 나는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기 위해 4층 객실로 내려갔다. 핸드폰을 챙기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몇 도 정도나 기울은 걸까?”라고 묻기에 핸드폰에 있는 어플을 이용해 재어보니 45도가 좀 넘게 기울어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가판으로 나가려니 조금전 내려갈 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더 심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올라가기 힘들어 점프해 문틀을 겨우 잡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그때 대피할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때 배가 좌초될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하지 못했다. 4층에 물이 들어오지도 않았고,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았고, 방송내용도 아주 차분하게 자기자리를 지키면 안전하다고 했다. 바닥방에 함께 모여 있던 아이들이 한쪽으로 미끄러지고 출구가 위로 향하자 “아저씨, 어떻게 해요”라며 소리를 질렀다. “괜찮을 거야” 하며 서로 위로하는 침착한 아이들이 많았다. 밖에 나온 아이들도 기울어진 배 때문에 벽 한쪽으로 밀려 기대있는 상태였다.”
승무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승무원들이 선장의 지시에 따라 방송을 했고, 위에서 다시 내려올 지시를 기다렸으나 지시할 선장이 이미 없으니 다음 지시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박지영 씨를 비롯한 서비스직 승무원들이 위험한 상황을 감지하고 오히려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했다. 구명조끼가 승객들에게 전달된 것도 서비스직 승무원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급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구조했는지?
“복도에 있는 아이들을 헬기에 태우는 것을 도운 후, 아이들이 많을 듯한 3·4층이 연결된 홀로 갔다. 구조하기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으나 소방호스를 구조물에 연결해 세 사람을 나오게 했다. 하지만 배는 급속도로 물이 찼다. 거센 물살을 이겨내며 정신없이 아이들을 끌어당긴 후 마지막으로 손에 닿은 5세 정도 아이를 안는 순간 불어난 물에 떠밀렸다. 아이를 높이 들어 올리고 ‘받아 달라’고 소리쳤다. 구조된 후 뉴스영상을 보며 그 아이가 권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권양을 받아준 그분께 감사하고 있다. 권양을 구한 후 돌아보니 입구는 물로 막혀 있었다. 유리벽이 있었는데 무엇이든 잡고 유리창을 박살내지 못한 죄책감과 아쉬움이 크다. 그때 더 바른 생각이, 빠른 대처법이 생각났다면 결과는 더 나아졌을 것을….”
당시 일을 기억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힘이 들어도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아픈 기억만큼 지금 병원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야 배안에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은 오히려 처음 보다 지금이 힘들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현실은 점점 가슴 아픈 상황이고 지금의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더 견디기 힘들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병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다시 밝은 기운을 주는 것이다. 병원에서 피해자들을 위한 강연을 한다고 교육실에 모이라 해서 가보니 학생이 아니라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할 수 없이 학부모들과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당시 느낌은 실망스러웠다. 준비가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교육내용을 떠나 진행상황이 그랬다. 한 명 한 명 다가가서 돌보고 치료할 수 없는 걸까?”
건강이나 마음의 안정이 염려되는데 어떤가?
“오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살짝 흔들리니 두려웠다. 내가 나도 모르는 무엇인가에 잡혀있다. 그냥 웃고 이야기 할 때도 있지만 혼자 있을 때 적막감이 크다. 밤에 잠을 못자는 이유도 시간이 가면서 떠오르는 아이들의 모습 때문인 것 같다. 두려웠던 상황에 있던 아이들에 대한 기억에 저절로 눈물이 난다. 어른인 내가 이 정도라면 여기 있는 아이들은 오죽 하겠는가?”
박향신 리포터 hyang30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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