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섭리는 미묘하여 창조하는 이가 있으면 파괴하는 이도 있고 파괴가 우심할 때는 반드시 보호 유지하는 이가 나타나서 그 멸실을 방지함으로써 소생의 기틀을 마련해놓는다’
간송의 마음이 올곧이 전해진다.
간송 가는 날
1971년 가을 첫 전시회 이후 성북동 간송미술관(보화각)에서 일 년에 두 차례만 볼 수 있었던 간송 미술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간송 가는 날’이라는 별칭을 붙일 만큼 의미 있는 전시다. 지난 가을 3~4시간을 줄을 서더라도 반드시 가보고야 말겠다는 계획이 어긋나며 아쉬워하던 차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관과 함께 상시 전시된다는 소식에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을 앞세워 간송 문화전을 찾았다. 도굴꾼들에 의해 일본으로 팔려갈 문화재를 국가나 기관이 아닌 개인이 사재를 들어 사들이고 목숨까지 거는 위험한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던 간송의 마음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진 것일까? 평소의 장난기는 사라지고 문화재를 감상하는 모습이 제법 의젓하다.
DDP 배움터 디자인박물관 2층에 마련된 이번 전시는 1부(3월21일~6월15일)과 2부(7월2일~9월28일)으로 나누어 교차 전시 하게 될 예정이다. 1부 ‘간송 전형필’전에서는 ‘문화적 독립운동가’라고 불리는 간송이 문화재를 수집해온 일화를 스토리로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영국인 존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를 구입하기 위해 당시 기와집 400채 가격에 달하는 돈을 주고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65호), ''청자압형연적''(국보 제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보물 제286호) 등의 고려시대 청자를 사들인 사연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전시관의 하얀 벽면에는 간송이 문화재를 수집해온 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간송의 위대한 업적은 문화재를 모으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광복이후 보성중고등학교 졸업식을 항상 3월1일에 거행하고 이날은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했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하니 간송의 애국정신을 알 수 있을만하다. 전시장에 가면 그때 낭독했던 간송의 친필 독립선언서를 볼 수 있다.
전형필 선생이 모은 문화재는 범위가 넓고도 방대해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고 할 정도니 가히 컬렉션이라고 표현할만하다. 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국보 제70호),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 30점을 담은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창자상감운학매병(국보 제68호) 등 간송미술관 소장품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130여점의 고미술품을 만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원형이자 정수인 국보급 문화재들이 대거 출품되는 만큼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 문화의 지향과 성과를 실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외에도 간송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비망록, 친필에세이 등 간송의 체취가 오롯이 담긴 유품과 유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간송 문화전 현장스케치
이번전시의 백미는 유네스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와 같다고나 할까? 특히 한글의 창제이념과 구성원리가 상세하게 수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거간이 제시한 금액의 10배가 넘는 돈을 주고 사들였고 6.25전쟁이 일어났던 때에도 항상 선생의 품에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조선총독부가 한글말살정책을 펼치던 시기여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거래였고 뼈에 사무치는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라는 간송 후손의 표현에 공감이 간다. 심지어 잘 때까지도 배게 밑에 보관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흰 벽면의 새겨진 사진에서 온화한 미소로 내려다보는 듯 한 모습에 다시 한 번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런데 정작 훈민정음 해례본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닥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관람을 하게 되어있고 줄을 서서 이동하다보니 오래 머물고 싶어도 뒷사람에 밀려 앞으로 전진해야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 무엇보다 음성해설기를 통해 문화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좀 더 의미 있는 전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동안 책으로만 봤던 문화재를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여서 딸이 고3인데도 함께 왔다”는 주부 임희옥씨(54)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시설에서 전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좋지만 예전의 정겨움이 사라진듯해서 보화각 시절이 그립다”며 “특히 그림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서양미술 전시회처럼 우리 미술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음성해설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한다.
이번 전시가 보화각 시절의 전시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첨단기술과 함께한 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UHD 콘텐츠로 제작하고 이를 TV에 담아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소중한 가치를 고화질의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 특히 심사정의 대폭산수화권인 ‘촉잔도권’(길이 818㎝ㆍ높이 58㎝)을 고화질로 촬영하여 한 마리 새가 날아다니며 산수를 구경하는 듯 표현한 스크린 속 영상은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이 마치 실제 경치인양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첨단설비를 이용한 다양한 접근을 통해 현대와 고전의 교류를 시도하는 전시가 오히려 성북동 간송 미술관시절을 그리워지게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옛것은 옛것의 시각으로 보고 싶은 리포터만의 고집스러움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는 간송문화전에 출품되는 작품들을 통해 국제적 보편성과 독자적 고유성을 조화시키며 발전해 온 우리 문화의 원형을 확인하고 내재된 탁월한 문화 창조의 능력을 새롭게 인식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은경 리포터 hiallday7@naver.com
<간송문화전 관람안내>
1회차 10:00~13:00 2회차 13:00~16:00
3회차 16:00~19:00 4회차 19:00~21:0)
*단 4회차는 매주 수, 금요일에만 운영됨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 일반 8000원 학생 6000원
찾아가는길 : 지하철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1번출구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DDP)
전시문의 : 070-4217-2524
홈페이지 : www.ddp.or.kr www.kans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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