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 먹이고 기저귀 갈며 아이를 키우고, 초등학생 중학생을 거쳐 엄마 손을 떠나면 집안에는 조용한 시간이 늘어갑니다. 주부들은 그때 재취업이나 취미생활에 공을 들이곤 합니다.
교하에는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는 주부들이 있습니다. 숲속길 안에 자리하고 있어서 ‘숲 담은 그림방’이라 이름붙인 홈스쿨 화실의 주부 수강생들입니다. 늦깎이로 그림을 배우는 즐거운 주부들을 소개합니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낯선 그림의 세계에 빠지다
지난 목요일 오후, 점심시간을 막 지난 시간에 숲 담은 그림방을 찾아갔다. 4명의 주부들이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있었다.
권내경(교하, 38) 씨는 곧 이사할 집에 걸어둘 정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아이가 어리니까 뭐 그려달라고 하는 게 많잖아요. 그런데 개를 그리면 곰이 되고 곰을 그리면 너구리가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조금만 배워보자고 왔어요. 애가 그려달라고 하는 걸 그려줄 수 있는 정도로 하자는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욕심 없이 시작한 그림은 생각보다 쭉쭉 진도가 나가 색연필화에서 시작해 수채화를 거쳐 유화로 까지 발전했다.
이진미(봉일천, 44) 씨는 색연필을 잡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진미 씨는 영국 여행 중에 벤치에 앉아 스케치하는 노인들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그림을 시작했다.
“금융회사를 이십년 넘게 다녔어요. 만날 숫자만 봤으니까 그림은 낯선 분야고 되게 어려울 줄 알았는데 해보니 몰입도 잘 되는 거예요.”
어느덧 6개월을 넘어서고 있다는 이진미 씨. 남편에게는 뜨개질을 가르치고 자신은 그림을 그려 영국에서 만난 노부부처럼 아름답게 나이들어 가는 것이 이 씨의 소박한 바람이다.
아이와 소통법 가르쳐 준 그림
‘숲 담은 그림방’은 정하영(34) 씨가 운영하는 화실로, 시작은 주부 대상이었지만 그 자녀들과 주변 직장인들까지 아우르는 동네 화실로 품을 넓혔다.
지미옥(운정, 41) 씨는 그림방에 아이를 먼저 보내다 늦게 합류한 경우다. 딸을 따라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지미옥 씨에게 자녀와 소통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둘째 딸이 그림을 배우면서 칭찬 받고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제 그림을 보고 아이가 칭찬해 주기도 하고요. 서로 경쟁도 하고 공감도 하고 대화도 전보다 더 많이 나누게 돼서 관계가 좋아졌어요. 언니랑 유대관계가 깊었는데 둘째랑 둘만의 시간을 가지니까 가까워 졌어요.”
지미옥 씨가 그림을 그린 지는 이제 갓 한 달.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변화를 겪었다.
“아이가 퉁명스럽게 말하던 것이 없어졌어요. 둘이 있으니까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떨 땐 화실 선생님한테 저를 이르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고요. 제 아이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줄 정말 몰랐어요.”
처음 화실에 와서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하지 않던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건 정하영 강사가 키우는 닥스훈트 강아지 마둥이였다. 유난히 순한 마둥이는 지 씨의 아이 뿐 아니라 말문을 닫은 아이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신기한 강아지다.
꿈을 찾아가는 늦깎이 화가들
한창 주부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건장한 남자 회원이 들어선다. 월롱역에서 가족들과 오리고기전문점을 운영하는 김영은(월롱, 26) 씨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을 어른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배우자고 마음먹고 화실을 찾다가 알게 돼 숲 담은 그림방 문을 두드렸다.
“학원보다 편안하고 자유스러워서 좋아요. 시간이 딱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요.”
주부 수강생들에게 김영은 씨는 ‘말 없는 수강생’으로 통한다.
“한 번 말을 하면 수다스러워서 그림을 못 그리게 될 거 같아서요.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어요.”
미술로 꿈을 찾는 이는 또 있었다. 운정에서 온 고슬비(29) 씨다.
“친구가 웹툰 작가로 연재하고 있거든요. 실력을 쌓고 나면 저도 동화나 애니메이션 쪽 일을 해보고 싶어요.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저도 한 번 제 꿈을 펼쳐 보고 싶어요.”
쉽고 부담 없이 배우는 그림
정하영 강사는 결혼 전에는 입시미술 학원과 출판편집 디자이너로 일했다. 주부들을 가르치는 일은 적은 돈에 긴 시간이 들어가지만 그래도 정하영 씨는 어떤 일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학생 때는 미술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혼자 몰래 그림을 그리느라 힘들었고, 일로써 그릴 때는 상업적으로 움직이니까 고되고 싫었어요. 즐겁지 않게 그림 그리는 건 그만하고 싶어 순수 미술을 보다 저렴하고 쉽게 다가가도록 시도해보자 생각하고 문을 열었어요.”
돈, 재능이 있어야 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 미술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싶어 비용은 저렴하게, 수업은 6개월~1년 단위로 빠른 속도로 가르친다.
교하 숲 담은 그림방의 수강생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8월에 전시회를 연다. 예술로 노는 즐거움을 맛 본 이들이 한 계절 지난 뒤에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벌써 기대된다.
문의 010-5355-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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