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를 닮고 싶었던 그는 느릿한 한 걸음씩을 차곡차곡 모아 목표를 향해 끈질긴 집중력을 보이는 거북이에 빠져 꽤 오랫동안 키웠다고 한다. ‘느림과 끈기’의 키워드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전민수군의 스펙은 사실 화려했다.
초등5학년 때부터 중3때까지 교육청 영재교육원과 연세대교육원에 다니며 ‘특별 수업’을 받았고 과학중점학교인 잠신고 수석 입학 등 ‘상위 1%의 지름길’을 달려온 주인공이었기에 전형적인 ‘범생이’가 연상됐고 만나자 마자 ‘알찬 스펙’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다.
그런데 답변이 의외였다. “중학 시절 영재 교육 받으러 다니고 성적도 꽤 좋은 축에 들며 과학 관련 상도 잇따라 받으니까 집에서 건 학교에서건 내게 거는 기대치가 높았어요. 압박감에 지쳐갔고 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환상의 덫에 빠져 버렸죠.”
기대에 짓눌려 ‘참 나’를 잊다
그는 겉보기는 화려했으나 속으로 아팠던 중3 시절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진짜 전민수’는 어느새 사라지고 꼭두각시로만 살다가 과학고 세 곳에 연거푸 떨어지면서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추락했다.
한없이 초라해진 그를 책이 품어 주었다.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은 일본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자서전 <학문의 즐거움>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어요. 머리가 좋지 않았던 그는 남들이 2~3번 책을 읽을 때 자신은 10번 읽겠다는 각오로 끝까지 노력했데요.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신념을 잃지 않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그의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이지 실마리를 얻었어요. 그러면서 ‘앎의 즐거움’을 스스로 터득했던 어린 시절의 뿌듯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다섯 살 무렵의 그에게 책은 신세계를 여는 열쇠였다. 한글을 떼기 전 워킹맘이라 바쁜 엄마를 졸라 줄기차게 책을 읽어달라고 떼를 썼다. 똑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씩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한 줄 몰랐고 한글을 깨우친 다음에는 혼자 동화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보고 다른 스토리를 상상해 보는 재미 때문에 책이 좋았어요.” 동화책을 시작으로 소설, 문학으로 장르가 다양해 졌고 내용이 딱딱한 수학, 과학책도 부담 없이 즐겨 읽게 됐다. 그러면서 과학자의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모님 권유로 교육청 영재교육원 시험을 봤는데 15명 정원에 18등을 했어요. 집에서 책으로만 익힌 과학 실력을 검증받자 ‘내게 재능이 있구나’ 자신감을 얻었죠.” 인정을 받으니까 신이 났고 더 파고들었다.
나노공학 만나며 미래 설계
과학탐구대회에서 상을 연달아 받고 강동교육청, 연세대 영재교육원에도 합격했다. “대학생 수준의 실험을 교수님 지도로 다양하게 해보며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상법을 많이 배웠어요. 특히 똑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지요. ‘천재구나’하는 아이도 여럿 봤어요. 교수님 설명을 곱씹고 여러 번 시행착오 거쳐야 겨우 이해하는 나랑 달리 그 아이들은 몇 마디만 듣고도 수학 공식이며 실험결과를 척척 이해했어요. 무엇보다 최고의 두뇌를 가졌는데도 끊임없니 노력하는 열정이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위축되기도 했어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자존감의 기복이 심했던 중학시절을 보낸 뒤 전군은 내적으로 여물고 단단해졌다.
“어릴 적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책을 잡았습니다.” 고교 입학 후 도서부를 신청한 그는 장르 불문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잊고 지냈던 즐거움을 다시 맛보았다. 덕분에 글쓰기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과학중점반은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줬다. “과천과학관, 천문대, 공룡화석지 등 다양한 현장 캠프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배운 게 많았어요. 내가 앞으로 공부하고 싶은 나노공학 분야도 과학관에서 처음 발견했지요. 어릴 때 레고 블록을 많이 가지고 놀았는데 아래부터 차곡차곡 쌓아 형상을 만드는 게 나노의 기본 원리와 레고가 많이 닮았더군요.” 그 뒤 곳곳에서 열린 나노 심포지엄 등 관련 학술 발표회와 코엑스 전시를 꼬박꼬박 찾아다니며 신기술의 흐름을 부지런히 쫓고 있는 중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바뀌지 않았던 과학자의 꿈은 연구원이라는 직업으로 구체화됐다. “알던 지식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지식의 연결고리를 찾아 확장해 나가는 ‘그 과정’이 재미있어요.” 같은 호기심을 지닌 친구들끼리 스팀(STEAM) 동아리를 만들어 고2 내내 즐겁게 과학과 놀며 과학축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지리산 종주하며 몸으로 배운 깨달음
“공부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담임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한 2박3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떠올려요.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견디고 겨우겨우 올랐던 천왕봉 정상에서 맛본 희열은 최였죠. 앞으로 1년도 그때 만큼 힘든 시간의 연속이겠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하루하루 충실히 공부의 재미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중입니다.” 차근차근 속내를 털어놓는 전군은 의젓하고 성숙해 보였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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