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날인] 김기열 동북고

공교육 100% 활용하는 ‘호빵맨’

지역내일 2013-11-19

탁월한 두뇌, 흠잡을 데 없는 스펙, 능수능란한 자기 표현력. 삼박자를 골고루 갖춘 엄친아, 엄친딸들이 상당수의 ‘평범한’ 고교생들을 주눅 들게 만든다. 이번 빛날인의 주인공은 철든 뒤부터 ‘내 인생 어떻게 살까?’를 충분히 고민한 다음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아 우직하게 길을 내고 있는 ‘보통의 고교생’이다.

김기열

동북고에서 만난 귀인들
 우공이산(愚公移山 우직하게 한우물을 파는 사람이 성과를 거둠). 뿔테 안경 너머로 순박한 눈매를 지닌 자칭타칭 ‘호빵맨’이라 불리는 동북고 김기열군을 만나면서 가장 먼저 스친 단어였다.
 <오래된 미래>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나라의 힘은 수학 수준에 비례한다> <열하일기> <다윈지능>... “책 읽기를 즐기던 학생은 아니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김 군이 고교생이 된 뒤부터 여러 번 곱씹으며 읽은 인문학 서적들이다.
 입시에 쫓기는 고교생이 더군다나 이과학생이 쉽게 탐독할 만한 책은 아니라서 ‘특별한 계기’가 궁금했다. 그러자 “고1 때 얼떨결에 들어간 학교 독서토론반에서 내 인생의 귀인들을 여럿 만났다”라는 김군의 즉답이 돌아온다.
 동북고의 통합논술은 경제, 윤리, 과학, 수학 등 여러 과목의 교사들이 한 교실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는 입체적인 융합 수업으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통합논술반의 대장격인 권영부 교사를 김군은 고1 때 담임으로 만났다. “50대인 선생님을 반 아이들이 ‘형’이라 부를 만큼 따랐어요. 담임선생님이 좋아 독서토론반에 들어간 셈이죠.”

인문학, 한의학 책 읽으며 길을 찾다
 그곳에서 그는 색다른 책읽기 방법을 만나게 된다. 독서는 곧 줄거리 파악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는 관점을 세워 내용을 추리는 법, 다르게 생각하기, 책의 메시지를 실생활에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우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쟁쟁한 선생님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학생들 앞에서 쏟아냈어요. 많을 땐 한 시간 동안 4~5명의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강의를 하셨죠. 논쟁이 불붙을 땐 선생님들끼리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면서요. 그 과정이 흥미진진했고 인문서의 색다른 묘미를 발견하게 됐죠. 방과후에 진행되는 이 수업을 2년 내내 빠지지 않고 들을 만큼 푹 빠졌어요.”
 어릴 때 말을 더듬어 남 앞에 서는 걸 꺼려하는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혼자 공상에 빠지는 걸 즐기며 틀에 맞춰 사는 걸 질색하던 김 군은 생각과 지식을 연결해 자신만의 관점을 세우는 독서, 토론, 논술이 한데 어우러진 ‘진짜 공부’를 만나면서 부쩍 자랐다.
 처음엔 조용히 듣기만 했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강의를 들으며 생각한 내용을 글로 쓰게 되고 점차 말로 표현하는 단계까지 성장해 나갔다. NIE 교내 대회에서 상을 받을 만큼 글 솜씨까지 늘었다.
 “얼마 전에는 서해대교를 지나며 과속단속 카메라를 보니까 수학에서 배운 미분 원리가 생각나면서 ‘구간 단속’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어요. 이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서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고 서로 토론을 벌였죠. 이렇게 책에서 배운 지식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니까 재미있어요.”
 일단 발동이 걸리면 우직하게 제 몫을 다해내는 김군은 1,2학년 반장을 맡아 매끄럽게 반을 이끌어 또래들 사이에 신망도 두텁다.

침술에서 발견한 한의학의 매력
 김 군의 장래희망은 한의사. 어릴 때부터 허리가 자주 아팠던 그는 중3 추석 때 충북 음성의 할머니 댁에서 갑자기 찾아온 허리 통증 때문에 앓아누웠다. 수소문 끝에 시골 한의원의 30대 젊은 한의사에게 장침을 맞은 뒤로 신기하게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걸 계기로 한의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고교 입학 후에 책읽기에 재미 들이면서 침뜸, 음양오행 관련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어요.”
 특히 학교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배운 동양의학은 매력적이었다. “우리 몸 구석구석의 혈자리를 체계적으로 배웠어요. 선생님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혈을 눌러보며 담배 피우는 학생을 족집게처럼 찾아내고 두통 때문에 고생하는 아이의 가슴 부위에 있는 천지혈을 눌러주니까 통증이 사라지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점점 한의학이 매력 있는 학문으로 다가왔고 한의사의 꿈을 품게 됐습니다.”
 김 군은 2학년이 되면서 다니던 학원을 모두 정리하고 혼자 힘으로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학원의 틀에 나를 맞추는 게 체질적으로 맞지 않은데다 ‘내 공부는 내가 해야 겠다’는 오기가 났어요. 학원을 끊고 난 뒤 수업시간에 훨씬 집중하게 되고 내게 절실한 공교육 프로그램을 스스로 찾아 듣게 되더군요. 덕분에 각종 과학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 거점학교 문정고의 생명과학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게 됐지요.”
 스스로 정한 한의대라는 벅찬 목표를 향해 조바심 내지 않고 뚝심 있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김군의 얼굴에서 ‘우공(愚公)’의 끈기가 엿보였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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