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터가 떠난 가을여행-강원도 인제군

설악의 가을 속으로 나를 가둔다

지역내일 2013-10-23

귓가로 스치는 가을바람이 기분 좋은 10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설레이게 한다. 가을이 되면 누구나 다 시인이 된다. 바람, 하늘,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핏빛처럼 붉은 나무잎사귀까지도 글의 주제가 되어 머릿속에 또는 입에 오르내린다. 이처럼 가을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애잔한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 계절이 지닌 색깔 때문이다. 색 바랜 컬러사진의 한 귀퉁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정겨워지는 그런 색깔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2013년의 가을을 기억나게 할 여행을 계획한다. 지도를 놓고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다 눈에 띄는 곳, 바로 강원도 인제군이다. 설악산이 지척에 있는 그곳. 설악의 가을 모습이 궁금해진다. 가녀린 소녀처럼 청초할까? 아니면 화류계 여인네처럼 화려할까? 

설악1

붉은 가을은 사람도 아름답게 만드는 구나
아침 일찍, 출발한 승용차는 기어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에서 멈추어 섰다. 평촌 농수산물시장에서 이정표를 보고 진입한 순간부터 출근시간에 맞춰 쏟아져 나오는 차량 행렬에 파묻혀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서울춘천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그나마 소통이 원활해졌다. 단풍철이라 길에는 강원도로 향하는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잠시 쉬기 위해 들른 가평휴게소에도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인파들로 붐볐다. 
인제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얼마 전 개통된 서울춘천고속도로를 경유하면 3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차를 몰아도 2시간30분이면 넉넉하다. 단 차가 밀리지 않을 경우다. 동홍천IC에서 인제 가는 44번 국도에는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고개를 돌려 이쪽 저쪽을 살펴보면 예전 황량했던 군사도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라졌음을 느낀다. 도시의 모습은 경직된 느낌이 사라지고 오히려 새롭고 활기차다. 그러나 간간이 카키색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과 군용차량, 심지어 탱크까지 지나다니면 이내 이곳이 강원도임을 그리고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인제의 특산물인 황태는 아마도 이곳에서 먹거리의 지존임이 분명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대다수 식당의 주메뉴가 황태요리인걸 감안하면 역시 황태의 고장답다. 길을 가다 운이 좋다면 황태 덕장도 구경할 수 있다. 아직 황태를 말리는 철이 아니라 덕장은 텅 비어있지만 시베리아 벌판처럼 추운 긴 강원도의 겨울을 보낸 황태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음을 짐작해본다. 

설악2

백담사 그리고 만해 한용운
인제로 가는 길, 원통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인구밀도는 가장 낮은 곳이 바로 인제다. 인제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통역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인제하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라는 말을 떠올리는데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어느 임금이 난리를 피해 이 고을에 와서 머물렀다. 그는 한양의 형편이 궁금해 몇 차례나 사람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이가 없자 다시 한 사람을 보내면서 “인제 가면 언제 오겠느냐” 라고 묻고 “만일에 또 돌아오지 않는다면 원통해서 못 보내겠다” 라고 했는데 그 말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인제는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들이 많다. 전방 지역의 기온을 이야기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향로봉이 해발 1293미터이고 응봉산이 1271미터, 설악산이 1708미터에 이른다. 우리나라 사람 치고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한번쯤 다녀오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로 설악산은 우리에게 친근한 산이다. 특히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역할을 하는 인제는 십이선녀탕, 옥녀탕계곡, 백담사 등이 지척이고 내린천을 따라 방태산자연휴양림, 진동계곡, 곰배령 등이 원시 상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거했던 곳으로 유명한 백담사로 차를 돌렸다.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서기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인했다고 쓰여져 있다. 이후 한계사는 조선시대 영조51년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가 1783년에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서 사찰을 세운 데에서 일컫게 되었다. 내설악 깊은 오지에 위치해 있어 옛날에는 좀처럼 찾기 힘든 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백담사는 현재에는 용대마을 향토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해 절 입구까지 오를 수 있다. 

설악3

이날 찾은 백담사 입구 버스정류장에는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맨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러나 매표소에서 백담사까지 7km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복장은 등산복 차림인데 20∼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버스를 타고 백담사까지 오른다. 백담사로 올라가는 계곡 굽이굽이 흐르는 물과 산의 모습은 이곳을 오르는 이들로 하여금 겸손과 인내를 갖게 만든다. 누구 할 것 없이. 백담사에 도착해 시선을 사로 잡았던 건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쌓아놓고 간 돌탑과 만해기념관이었다. 만해 기념관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집필한 책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는 1905년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한 독립운동가 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념관에 들러 그가 이곳 백담사에서 출가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님의 침묵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설악4

하산하는 길, 멧돼지 한 마리를 보았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먹이를 찾아 이곳 백담사까지 내려온다는 멧돼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친근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만 볼 뿐. 그 모습을 뒤로하고 산을 걸어 내려왔다. 천천히 걸어야지, 설악의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키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걷는 것보다 느리게 걷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오랜 도시생활에서 늦게 걷는 법을 잊어버린 탓인지 숨을 헐떡거리며 바쁘게 내려오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쉬울 듯 하면서도 어렵다. 벌써 마음이 행동이, 빠른 것에 익숙함이다. 몸은 백담사에 있지만 마음은 벌써 안양에 도착한 듯했다.
배경미 리포터 bae@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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