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소중한 이유는 떠날 수 있어서라기보다 돌아올 수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든 당면한 현실이든 삶에는 길 위에 섰을 때야 비로소 선연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여행은 목적이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설레임이자 두근거림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치고 경주로 수학여행을 안 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배움의 연장선이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학교와 집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설레임으로 떠났던 경주여행. 어른이 된 지금 다시 그곳을 찾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흔히 문화유적을 찾아가는 발길 속에는 잊혀진 것, 혹은 잊혀질 위기에 처한 것들에 대한 향수가 포함되어 있다. 막연한 그리움으로 옛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경주 그리고 다시 새롭게 비쳐지는 모습들. 신라 천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곳에서 익어 가는 가을을, 그리고 추억을 되새겨본다.
예술과 과학의 조화로운 산물, 첨성대
학창시절, 잔뜩 부풀어오른 기대감에 맞닥뜨린 경주에서 첨성대를 보곤 너나할 것 없이 실망감에 빠져든 적이 있다. ‘이게 뭐야? 겨우..’그러나 첨성대를 하잖게 보면 안 된다. 겉보기에는 그냥 단순한 돌 벽돌 구조물 같지만 이 첨성대에는 오묘한 수학적 상징이 숨어있다. 고대에는 별을 보는데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해 별이나 일월오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첨성대를 보고 어떤 사람은 불교의 수미산을 상징한다고 했다. 또 사방 어디에서 보나 똑같은 모습 그 자체로 해시계의 역할과 제사지내는 제단이라고도 주장했다. 당시의 천문학적 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 건물인 첨성대는 첨성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바닥에 비치는 것을 보고 춘분, 추분, 하지, 동지를 측정했다. 밤하늘의 별 한 번 쳐다볼 여유 없이 사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천문이란 그저 일기예보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 사람들에게 천문관측이란 하늘을 통한 통치행위라 할 수 있다.
첨성대는 유연하고 아름다운 곡선형태이고, 중간창 이하의 11단까지는 내부에 흙이 채워져 있는데 이는 첨성대가 원형이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구조물의 변형을 방지하고, 진동이나 지반 침하 등으로 인한 붕괴에 대비해 원형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첨성대를 만든 돌의 개수는 1년 365일을 상징하는 365개로 첨성대의 돌을 쌓은 단수는 27단. 바로 첨성대를 축조한 선덕여왕이 신라 제27대 임금인 까닭이다. 또 꼭대기의 정자석까지 합하면 28단. 그리고 2층으로 된 기단부까지 합하면 29단. 혹은 30단이 되니 28이라는 숫자는 바로 별자리의 28수와 통하고 29, 30은 음력의 한 달 길이에 해당된다. 또 난 창문을 기준으로 아래위로 12단을 나뉘어져 이는 일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한다.
대왕암이 한 눈에, 이견대 그리고 감은사
차를 몰아 감포로 달렸다. 경주에 왔으면 바다도 봐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감포읍 대밑길에 이르러 이견대 앞에서 차를 멈췄다. 이견대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정자에 올라서면 대왕암이 한 눈에 보인다. 그리고 눈이 부시게 푸른 바다도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옥대와 만파식적 피리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견대를 보면 감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 감은사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감은사에는 석탑과 절터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가장 큰 삼층석탑 두 기와 금당과 강당, 회랑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감은사지 금당 터에는 신문왕이 절을 지을 때 죽으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선왕의 유언에 따라 금당 구들장 초석 한 쪽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감포항에서 만난 맛 집, 북해도
어느 여행지를 가나 한 번쯤은 들르게 되는 음식점들. 낯선 곳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나면 로또복권 5등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뿌듯해지는 것은 왜일까? 거기다 주인의 인심까지 넉넉하다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운 좋게 감포항에서 만난 횟집 북해도는 그래서 더 살갑고 정겨운 곳이었다. 감포항에 들어선 수 많은 횟집 가운데 3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손수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올해 일흔 넷의 엄광자 할머니가 있는 그곳, 북해도.
“좋은 구경했거든 좋은 거 묵고 가거라. 여는(여기는) 손님들한테 싱싱한 고기만 판다. 도회지같이 눈 속이고 그런 거 안 한다.”
할머니의 구수한 경상도 입담에 잠시 고향에 온 듯 착각에 빠져 들 즈음, 회 한 접시가 상위에 올랐다. 무지개 빛이 돌만큼 싱싱해보이는 회 한 점을 입안에 넣는 순간, 북해도에 들른 것을, 엄 할머니를 만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젓가락과 숟가락이 바쁘게 움직이고 포만감이 느껴지자 잠시 행복감에 빠져든 필자에게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불리 묵었나? 다음에 또 온너래이(오너라).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은 다 내 자식같이 귀한 사람들인기라. 자식한테 아끼는 거 봤나?”
배경미 리포터 bae@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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