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어디까지 가봤니?
김문기 일가의 충효가 담긴 ‘오정각’과 ‘고송정’
단종을 향한 그리움에 소나무가 마르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열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사육신 김문기의 충절을 기린 유적이 안산에 있다. 가족과 함께 가을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인 오정각과 고송정이 있는 너비울 마을을 찾았다.
탄옹 김충주 집터에 복원한 고송정
화정2동이 자연마을이었을 때 이름이 너비울이다. 화정동 영어마을 건너편 너비울 마을을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는 방법은 고잔역에서 6-1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된다. 자가용을 이용할 때는 화정천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다 화정교회 앞에서 오른쪽으로 나가면 바로 너비울 마을이다.
김녕 김씨의 집성촌이었던 너비울 마을의 시작은 ‘숯굽는 노인’ 탄옹에서 시작됐다. 조선전기 문신인 김문기가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 세조의 칼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그의 손자 김충주가 숨어든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억울함과 쫓겨 난 왕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던지 소나무 옆에서 매일 눈물을 흘려 소나무가 말라죽었다는 전설이 남아 고송정지라 이름 붙었다.
너비울 마을은 전원주택과 음식점 공장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감나무와 지붕 낮은 주택이 따사로운 햇살아래 옹기종기 모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고송정지 초입에 이른다.
든든한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앞을 지키고 어여쁜 향나무가 다정한 친구처럼 기대 선 곳에 고송정이 자리잡고 있다. 1827년 김처일이 9대조 탄옹 김충주를 기리며 세운 정자다.
정자는 논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경계에 만들어져 정자 앞은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뒤편엔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져 마을 주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고송정 앞에서 만난 김00씨는 그도 김녕 김씨의 후손이다. 00씨는 “이 자리는 탄옹의 집터였고 고송정 뒤로 올라가면 탄옹 김충주 할아버지의 묘소와 그 아들 묘도 있다. 어릴 때부터 탄옹 할아버지와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한다.
충신가문에서 난 효자들
충신의 가문인 김녕 김씨 후손 중에는 유난히 효자들이 많다. 00씨는 “한 겨울에 아프신 아버지가 버섯이 먹고 싶다고 하자 효자 아들은 버섯을 찾아서 여기 뒷산을 다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때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서 버섯을 구해 아버지를 봉양했다는 이야기다”며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산기슭 그 때 버섯을 구한 자리에 ‘균원’이라는 글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너비울 마을의 또 하나의 자랑인 ‘오정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금은 김문기와 그의 아들에게는 충신 정각을 김충주와 자손에게는 효자 정각이 내렸다. 가문은 정각 5개를 모셔둔 사당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정각’이다.
정각이란 현재에 비교하면 대통령 표창장이나 훈장이다. 임금은 충신이나 효자에게 그의 업적을 세긴 정각을 하사하는데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다. 김녕 김씨에게는 그런 정각이 다섯 개나 된다.
오정각은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았다. 후손들은 매년 한 차례 이곳에서 시제를 모신다. 몰래 들여다 본 오정각. 김문기의 초상화와 정각 다섯기가 방을 차지하고 있다. 충과 효를 목숨보다 소중히 생각했던 정신문화가 남긴 유산이다.
재미난 이야기거리가 곳곳에 숨어있는 너비울 마을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사가 대입 필수과목에 포함되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발 빠른 학부모들은 벌써 역사 잘 가르친다는 사교육업체를 검색하기 바쁘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먼저 너비울 마을을 추천한다.
하혜경 리포터 ha-nul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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