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정말 바쁜 달이다.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뭔 날이 이리도 많냐’는 주부들의 푸념이 저절로 나온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5월을 보내는 가정의 풍속도도 날라지기 나름. 우리 지역 주부들에게 가정의 달을 보낸 소회를 들어봤다.
어버이날은 달랑 편지 한 장, 스승의 날은 쌈짓돈 털어
이혜령(잠실동 40대)
고2 외동딸은 고교 입학한 뒤로 더 이상 어린이날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대신 어버이날은 ‘저비용 고효율’로 치르기 위해 고심하는 눈치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딸은 어버이날을 앞둔 주말, 오랜만에 집에 오더니 슬며시 편지 한통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엄마께’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그동안 엄마에게 아픈 말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앞으로 성적을 끌어 올려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굳은 다짐까지 고민하며 써내려간 딸아이의 진정성이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읽혀졌다. 남편이 읽고 있는 편지에도 비슷한 맥락의 글이 담겨 있었다.
선물 없이 달랑 편지 한 통이었지만 자식 키운 보람을 맛보았고 이젠 우리 딸이 더 이상 철부지가 아니구나 하는 대견스러움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얼마 후 스승의 날이 되자 딸은 그동안 모아둔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 기숙사 선생님 선물사고 친구들과 파티 준비한다며 부산을 떨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자니 ‘엄마, 아빠를 그리 살갑게 챙겨보라지’ 묘하게 비틀린 질투심이 스멀스멀 나왔다.
고심해서 고른 어버이날 선물
이지원(잠실동 40대)
올해 중학교 입학한 딸에게 어린이날 전부터 “이젠 넌 어린이가 아니라 청소년이다”라고 못 박아 두었다. 지난해까지 엄마, 아빠로부터 각각 다른 선물을 챙기고 맛난 외식까지 당당히 요구했던 터라 딸아이는 못내 서운한 눈치였다.
받는 것에 익숙하고 주는 것에 인색한 딸아이의 잘못된 습성을 고쳐주기 위해 올해부터는 작심하고 어버이날은 꼭 챙겨야 한다며 당당히 ‘정신교육’을 시켰다.
어버이날 당일이 되자 신경 많이 써서 골랐다면 선물 두 개를 건넸다. “엄마는 여름이 되니까 발 각질제거제를 아빠는 술 마신 후 입 냄새 나지 말라고 미용 가글 샀어.”
여러 날 고심하며 선물을 골랐을 걸 생각하니 대견스럽고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해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자 딸아이는 으쓱한 눈치였다.
며칠 뒤 찾아온 스승의 날. 딸은 이 날을 깜빡하고 등굣길에 올랐다. 그러다 친구들이 너도나도 카네이션 사는 걸 보고 아차 싶어서 얼른 교문 앞에서 꽃 한 송이 사서 담임선생님께 드렸다며 자랑스럽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수업은 파티 분위기였다고 미주알 고주알 스승의 날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그 말 재미있게 들으며 내심 한편으로는 또래들과 어울리며 어른 챙기는 걸 배워나가는 딸아이의 ‘한 뼘 성장’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엽서 한 장에 녹은 마음
정혜윤(가명?41?신천동)
이번 5월은 정말 바빴다. 중학교에 입학한 큰 딸래미 신경 쓰랴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 신경 쓰랴 평소에도 눈코 뜰 새가 없는데 5월이 되니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까지 어느 하나 소홀할 수 없는 날들이 줄줄이다.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내심 중학교에 입학한 딸이 중학생답게 의젓하게 어버이날도 챙기고 어린이날도 그냥 지나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게 웬걸? 아직 동생이 선물을 받으니 자신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평소 무뚝뚝한 성격대로 어버이날도 그냥 지나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살가운 성격의 막내아들은 학교에서 쓰라고는 했지만 ‘엄마 아빠 만나 주셔서 감사하다’는 엽서를 보내와 딸에게서 서운하고 섭섭했던 마음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어버이날만 없는 우리 집
백경윤(45?잠실동)
우리 집엔 어버이날이 없다. 중학교 3학년, 2학년인 두 아들은 어린이날만 되면 아직도 자신들이 ‘어린이’라고 우겨댄다. 어린이날이 낀 주말에 시댁에 다녀왔다. 어버이날 선물과 용돈을 들고....... 하지만 정작 실속은 아들들이 챙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린이날이라고 꽤나 많은 용돈을 주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솔선수범하는 걸 보였느니, 나도 어버이날에 뭔가 받겠지. 돈도 있으니’라며 어버이날 선물에 내심 기대를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아들들에게 화가 정말 많이 났다. 우리 부부는 유치원, 초등학교 때 받은 종이 카네이션 외에는 어버이날 뭔가를 받은 기억이 없다. 안되겠다 싶어 강력하게 요구했다. 마음이 없으면 형식으로라도 어버이날을 챙기라고. 엎드려 절 받기로 다음 해 부턴 꼭 챙기겠다는 답만을 받고 2013년 어버이날도 그냥 넘겨야만 했다. 그런데 다음 주 큰 아들이 “선생님 선물하고 꽃 사야하니까 돈 좀 주세요”라는 말에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부모가 있고 스승이 있지, 너한테는 부모는 없고 스승만 있냐? 용돈 모아서 사. 나는 못 준다.” 결국 또 지갑을 열어야만 했지만 아직까지도 아들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남아있다.
메달로 받은 특별한 어버이날 선물
노주현(42?성내동)
누구보다 특별한 어버이날 선물을 큰 아들에게 받았다. 중학교2학년인 큰 아들이 태권도 특기생으로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딴 날이 마침 어버이 날이라 기쁘게 보낼 수 있었던 것.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어린이날을 특별히 챙기지도 못하고 늘 훈련과 연습에 매진하며 열심히 노력한 값진 결과이기에 어버이날 선물이라고 메달을 내놓는 아들을 보며 목이 메었다.
또 형과 6살 터울이 나는 작은 아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수 만든 꽃을 달아주고 막내다운 애교를 피우며 어버이날을 기쁘게 해주었다. 이래저래 잊지 못할 뜻 깊은 어버이날이 었다.
무뚝뚝한 아들의 꽃바구니
조성경(47?삼전동)
하나뿐인 고1 아들이 요즘처럼 멀게 느껴진 적이 없다. 워낙에 내성적이었지만 사춘기를 겪으며 그나마 있던 말문마저 거의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터는 묻는 말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일 뿐, 어떨 땐 목소리도 못 듣고 지나가는 날도 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린이날 행사도 없어졌다. 아들에게 어린이날은 단지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날’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하다. 어버이날 아침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등교한 아이. 남편은 “회사에 가면 모두들 카네이션 가슴에 달고 은근히 자랑하는데....... 난 꽃도 없어?”라며 한 소리 하고 출근한다. 내심 서운한 마음이 어찌 남편뿐이랴.
하루 종일 우울하게 보내고 아들이 오기 전 장을 보러 나갔다. 장보는 시간이 길어져 일정보다 늦게 집에 들어와 보니, 식탁 위에 작은 카네이션 꽃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꽃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아이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다. 한참을 울다 꽃바구니에 꽂힌 카드를 보곤 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드를 펴 놓고 한참을 고민한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드엔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엄마, 아빠. 어버이날 축하해요!’
정말 시크(?)한 우리 아들, 말은 안 하지만 선생님께도 작은 꽃다발 하나 올려놓지 않았을까?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해요!’라는 카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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