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날인] 정신여고 3학년 이가영

백혈병이 깨우쳐준 ‘산다는 것’

지역내일 2013-05-21

불운에는 커트라인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거듭되는 불운에도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인생 극장의 주인공’ 같은 사람에게서는 진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가영양,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에는 고단한 시간을 견뎌낸 강인함, 어른스러움이 살짝살짝 엿보인다. 


백혈병 때문에 잃어버린 중학시절
 IMF는 부잣집 딸로 아쉬움 없이 자란 그의 삶을 뿌리 채 바꿔놓았다. 사업 실패를 딛고 부모님은 동대문에서 장사를 시작하셨고 빈집에서 밤늦도록 엄마를 기다리며 그는 외로운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뒤로도 사기, 부도 같은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집안이 안정되는 가 싶더니 이번엔 이양에게 불운이 찾아왔다. 중학교 입학 후 팔과 다리에 부종이 생기더니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튼튼한 체력을 늘 자신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집 근처 병원을 찾았다가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그 뒤 지난한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처음 입원해 병실을 둘러보니 온통 머리카락 없는 아이들 뿐이더군요. 암울했죠.” 지옥 같은 항암치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움큼씩 머리가 빠졌어요. 절대 머리를 밀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고 병원 이발소에서 머리를 밀던 날 엄마가 슬퍼할까봐 씩씩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펑펑 울었어요,”
 4차까지 진행된 항암치료로 그는 초죽음이 되었다. “항암주사 안 맞겠다고, 병원가기 싫다고, 엄마 앞에서 펑펑 울었어요.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낸 건 처음이었죠. 그때 우리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며 말하셨죠. ‘조금만 더 참자고 조금만...’ 강인한 엄마를 보며 힘을 냈어요.” 항암치료를 끝내고 운 좋게 일본에서 골수기증을 받아 이식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무균실에서 가슴에 주렁주렁 관을 달고 지내며 독한 방사선 치료를 견디었다. 침을 삼키면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파 침조차 뱉어내야만 했다. “그 당시 내 소원은 물을 마시는 거였어요.”
 무균실 창문 앞에서 늘 편지를 붙여주며 용기를 주던 아빠와 오빠, 24시간 곁에서 15살 딸이 겪는 끔찍한 고통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엄마, 이런 가족의 응원이 그를 지탱시켰다. “조금씩 기운을 차리면서 교복 입고 학교 가기, 화장품 사러 가기 같은 버킷리스트를 적었어요. 내 또래 아이들에게 소소한 일상이 당시의 내겐 아주 간절한 소망이었거든요. 그래도 단 한 번도 죽는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내 소원은 ‘교복 입고 학교 가기’
 벼랑 끝에서 병마와 사투를 벌이느라 인생에서 가장 발랄했을 중학교 시절은 뭉텅이 채 잘려나갔다. 그는 졸업식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교복 입고 정신여고 첫 등교한 날을 잊을 수 없어요.” 부푼 기대를 안고 시작한 고교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제일 큰 난관은 친구 사귀기.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교실에서 그는 외딴섬이었고 화장실에서 혼자 훌쩍이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하나 둘 친구가 생기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여고시절이 시작되었다.
 수학여행, 친구와 수다 떨기 같은 평범한 일상들이 그에겐 모두 감동으로 다가왔다. 일본 애니메이션, 웰빙 걷기 동아리에서 회장으로 활동하며 숨겨진 끼를 발휘하기도 했다.
 2년 넘는 공부 공백기를 거친 이양에게 성적은 또 다른 도전 과제였다. “특히 수학은 인수분해도 못할 만큼 기초 실력이 없었어요. 우선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벤치마킹했지요. 수업 듣는 태도, 어떤 참고서와 문제집으로 공부하는 지 면밀히 관찰하고 그대로 따라했어요.”    방과 후 학원까지 다니는 건 체력적으로 무리가 있기 때문에 집에서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영어는 교과서를 무조건 달달 외웠고 암기 과목은 수업 내용을 따로 정리해 ‘이가영표 책’을 만들어 공부했다. 난공불락 수학도 ‘하면 된다’ 마음가짐으로 붙들고 늘어지자 공부의 감이 왔고 지금은 제일 잘하는 과목으로 바뀌었다.


돈 많이 벌어 암환자 돕는 게 꿈
 “시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쳐도 나는 학교 다니는 것 그 자체가 좋기 때문에 공부 스트레스는 받지 않아요. 대신 나는 경영학과 진학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요.” 투병생활 백혈병재단 등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그는 꼭 돈을 많이 벌어 사회에 보답하고 싶다는 소망을 늘 품고 있다.
 “돈 버는 마케팅 노하우를 속속들이 배워 내 사업체를 일구고 싶어요. 소아암, 백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꼭 돕고 싶습니다.” 죽음의 벼랑 끝에 서 본 그는 삶의 소중함, 시간의 귀중함을 매 순간 느끼며 산다.
 “목표도 꿈도 없이 사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점수 1~2점 때문에 울고 웃으면서 무조건 점수 맞춰 대학만 가겠다는 아이들이 꽤 많거든요.” 의젓하게 말하는 이양은 한마디 덧붙인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가영이 롤모델’이란 소리를 듣고 싶어요. 특히 아픈 환자들에게요. 한번 사는 인생 열심히 살아야죠.”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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