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가는 예술가의 길
바쁜 일과가 지나고 늦은 저녁이 오면 다양한 감정들이 밀려오곤 합니다.
뿌듯함, 피곤함, 허전함, 쓸쓸함….
나를 잊고 달려온 시간들을 뒤로하니 어디쯤 와있는지, 잘 왔는지 궁금해집니다.
지금 이웃집 주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들의 삶 속에 내가 찾던 바로 그 꿈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범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가꾸어나가는 우리 동네 주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이지윤 리포터 jyl201112@naver.com
장혜진(46·수내동), 유경원 주부(47·정자동)는 30년 지기 친구다. 고등학교 때 화실친구로 만나 각기 다른 전공과 직업을 가졌지만 탄탄히 우정을 다져온 베프(베스트 프랜드)다. 일이 바빠 잠시 작업을 쉬고 있는 친구까지 셋이 모두 분당에 살게 되면서 더 자주 만났고 그냥 만나 시간을 보내기보다 뭔가 함께 배우면 더 자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해 지난해 이맘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이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다시 전공을 살려 잘하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취미미술반이 있는 정자동 화실을 찾은 지 10개월. 제대로 할 일을 찾은 주부들의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나만의 시간을 가질 시기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 소망이지만 특히 주부들은 집에만 있다 감이 떨어져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될까 조바심을 내기 쉽다. 꿈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휴화산의 상태인 주부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내면의 부글거림과 늘 싸워야만 한다. 그래선지 문화센터, 스포츠센터를 이용하는 주부들이 많다. 여러 가지 관심분야를 접해보고 진짜 좋아하는 분야를 찾기 위한 취미맛보기나 건강도우미로 활용한다. 자신의 길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전문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유경원 씨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결혼 후에도 6년 반 광고디자인 일을 했지만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림 그리는 일에 관심이 있어 포크 아트를 깊이 배우기도 했었는데 작업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아이 유학미술을 알아보러 화실을 찾았지만 원장님과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화센타보다 전문적인 작가교육을 받고 싶었거든요.”
장혜진 씨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사군자나 풍경 위주의 수묵화를 그려봤을 뿐이었다. 졸업 직후에 결혼해 아이 둘 낳고 열심히 키우며 15년이 지난 8년 전, 우연히 인사동에서 지도교수님을 만났다. 잠시 잊고 지낸 미술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 대학원에 진학도 하고 작업도 다시 시작했었다. 하지만 가족 돌보는 일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 학기를 남겨놓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아쉽긴 했지만 아이 뒷바라지도 후회 없이 열심히 했어요. 지금도 아이가 최우선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어요. 올해 둘째까지 대학에 보내고 나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볼 생각입니다.”
큰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혜진씨. 보통 엄마들의 여유는 자녀교육과 밀접하다. 하지만 경원씨는 마음 속 관심 가는 일들은 일단 시작하라고 말한다. “결단을 내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예요. 하지만 마음먹은 순간이 시작입니다.” 시간도 저축 같아서 남는 시간을 자기시간으로 가지려면 시간이 없다. 자기시간을 빼 놓으면 오히려 남은 시간을 더 알차게 살 수 있다고.
진짜 작가가 되어 가는 주부들
선의 예술인 동양화를 전공하며 한 획을 긋는 무거움에 선뜻 작업하기 힘들었던 혜진씨는 한지를 덧붙이고 칠을 올리는 작업을 반복하는 방법으로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떼었다 붙였다 하며 실패의 불안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 감성적인 그녀에게 즉흥적인 표현기법은 자기 옷을 입은 듯 알맞은데다 해보지 않았던 영역을 배우고 작업하는데 대한 성취감도 느끼고 있다.
그날 입은 옷이나 네일 색상이 그날 작품 색상이라는 독특한 작업습관도 있다. 심각하기보다 즐기는 그녀의 작업관은 작품에서도 다작으로 이어진다. 하나씩 완성하기 보다는 한 번에 여러 작품을 벌려놓고 하는 편. 이제 작업하는 날은 아예 전화도 받지 않을 만큼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이 되었다.
언제나 가족들 뒷바라지로 가족의 주변에 있던 그녀는 이제 가족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엄마가 그린 작품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과 그림에 대해 토의도 하고 남편과 함께 한지를 사기 위해 인사동에 주기적으로 나간다.
경원씨 역시 가족들이 그림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해서 작업에 더욱 애착이 간다고 한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것이 생명인 디자인을 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하는 고민도 많았다. “색을 겹치고 긁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생각지 못한 결과에 당황하기도 했어요. 긁어냄은 계산했던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뒤집어져 밑색이 위로 올라오기도 해요. 이런 모습을 보며 예측은 빗나갈 수 있고 계획한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그림도 사람 사는 모습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경원씨의 성격 역시 작품처럼 많은 생각이 내재돼 있고 드러내지 않는 편. 패션 성향도 색감과 형태가 절제된 가운데 디테일이 있는 것을 선호하고 한번 맘에 든 물건은 아끼며 오래 간직하는 확고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그래선지 작업도 한 작품을 공들여 칠하고 긁어내며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
“작가정신이 있는 발상과 표현에 대한 궁금증이 막연했는데 작업하다보면서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작업이 바뀌어 간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스스로 못가는 길을 억지로 뒤에서 밀어주고 작업하도록 부추겨주고 북돋아주는 선생님의 열정이 정말 고마워요.”좋은 친구에 이어 좋은 멘토를 얻는 일 역시 인생에서 큰 행운과 행복으로 느껴진다.
워싱톤아트 홍다나 원장은 어느새 놀랍게 실력이 성장한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내면에 가득한 분들이라 숙제도 많이 주고 레슨 외 시간에도 자주 나와 작업하도록 푸시를 많이 했어요. 이제는 전문 작가로 등단해도 좋을 만큼 실력이 향상되었죠. 앞으로 번듯한 전시장에서 제대로 전시회도 갖고 등단도 시킬 계획입니다.”
홍 원장은 제자에서 동료 예술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도와주고 싶다고 말한다. 또, 작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고 자유로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작품은 생각 없이 벌리고 많이 작업해야 뭔가 나온다고 강조한다.
“그림을 통해 삶에서는 할 수 없는 시도와 파괴를 할 수 있죠. 내가 누군지를 알고 자신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는 일, 기술보다는 깊이나 분위기, 존재감과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제자와 선생의 관계를 넘어선 세 작가의 수다가 아닌 담론은 앞으로 더욱 풍성한 내용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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