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마지막으로 음주한 날짜 또는 처음으로 단주를 시작한 날짜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대개는 마지막으로 입원한 날짜이기도 하고, 혹은 마지막으로 퇴원한 날이기도 하다. 수많은 재발 후에 마지막 재발한 날인 셈이다. 바로 이 날짜가 잡히기까지 알코올의존인 사람 거의 대부분이 무언가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는다고 완강하게 자신의 음주 문제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지난 과거의 괴로운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싸우며, 원망과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이 부족하고 결핍한 상태로, 재발과 재발을 잇달으며, 겨우겨우 살아남은 것이다.
1972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와 닉슨에게 패배한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의 딸 테리 맥거번이 어느 추운 겨울 일요일 날 쇼핑몰의 빈 주차장에서 눈에 덮여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 때까지 그녀는 100여 차례 이상 입퇴원을 반복하였다. 딸의 음주 문제를 안타까워 한 아버지가 언젠가는 스스로 술을 끊으리라고 굳게 믿고, 아무리 재발을 계속해도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마지막 재발로 동사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경우가 아니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언제라도 단주는 가능하다. 그러면 그 직전까지의 과음이 마지막 재발이다.
비현실적으로 상대에게 기대하고, 이 때문에 실망하고는 분노와 원망에 휩싸여, 그러한 감정들을 잘 다루어내지 못하는 것이 재발의 가장 흔한 촉발인자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 복수심으로 더 퍼마시고 자신을 망가뜨려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심사인 것이다. 비관, 지루함, 앞으로 삶의 두려움 따위가 늘 만연하여 스스로를 괴롭힌다.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최악일망정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그냥 넘기고, 스스로를 더 괴롭힌다.
첫 한잔으로 바로 재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재발 과정은 그 첫 한잔으로 시작하여 끝나는 것이다. 재발은 단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첫 한잔을 마시기 훨씬 전에 또는 한잔을 마시겠다는 결심보다 훨씬 전부터 진행해온 과정이다. 재발할 때마다의 그 첫 한잔으로 이어갔던 자신의 행동 패턴을 찾아보고, 첫 한잔의 방아쇠와 이를 합리화하였던 구실을 알아야 한다.
재발한 것을 너무나 수치스럽게 여기는 수가 많다. 워낙 자존감의 상처가 깊은 탓이다. 여러 질환들 중에는 재발성이 큰 것이 특징인 질환이 많다. 질환 자체가 본디 그러한 것조차 마치 자신이 남보다 더 나약해서 그런 줄로 착가하는 수가 흔하다. 재발을 수치스러워하기보다는 그러고 나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재발은 전제 조건은 아니지만, 회복의 한 요소이자 부분이다. 재발을 통해 여기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재발할 때마다 조금씩 자신과 이 질환에 대해 더 많이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만약 한잔이라도 마시면 비용 걱정하지 말고 바로 입원시켜달라고 한달 입원비를 저축한 통장을 맡긴 L씨의 경우는 매우 교훈적이다. 재발에 대비한 자신 스스로와 주위 가족들의 행동계획을 미리 세워두면 도움이 된다.
신정호 (연세 원주의대 정신과 교수, 강원알코올상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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