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눈꽃 산행기

아름다운 세상을 걷다

지역내일 2013-01-10

나이가 들수록 잡념이 많아진다. 잡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즈음, 불현듯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인간의 궁색한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한다며 때론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의 품을 찾으라는 조언이셨다. 당시 어린 소녀에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어언 20여년이 흐른 지금, 당신의 말씀은 내일을 사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지난 한해 복잡다단한 일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움츠러든 겨울. 기운 찬 2013년을 다짐하며 생애 첫 눈꽃 산행을 큰 맘 먹고 감행했다. 구름과 맞닿은 능선에서 내려다 본 하얀 천국. 이곳이 바로 지상 최고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글/사진 피옥희 리포터 piokhee@empas.com 


 
-불운의 날씨와 행운의 조짐
그렇다. 날씨에 관한한 지지리도 운이 없는 리포터에게 오늘의 날씨는 당연한 결과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역시나 하늘은 먹구름 일색. 한라산에 오를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다 일단 내일을 기약하며 산행을 미루기로 했다.
갑자기 제주에 온 목적이 사라지니 당황스럽다. 다음 여정을 고민하다 마음을 내려놓고 녹차테마공원 ‘다희연’으로 향했다. 기념촬영용 조형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사진 찍히기를 워낙 싫어해 결국 조형물의 외관만 찍고 황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차(茶)박물관을 둘러 본 뒤 녹차 밭으로 향했지만 녹음을 만끽하겠다던 마음과 달리 추운 날씨는 뜻하지 않은 복병이었다.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굼떠졌나 싶어 자책하던 찰라 ‘동굴 카페’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동굴 모형이 아닌 진짜 동굴 카페, 여름 장마철의 축축한 기운마저 감도는 곳이었다. 동굴 외벽에는 뚝뚝 물이 듣는다. 신기함이 앞서니 습한 불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녹차 라떼와 녹차 아이스크림, 녹차 쿠키 주세요. 녹차 파이도 있나요?”
추운 날씨를 핑계로 녹차 밭에 가지 않았다는 죄책감 탓에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녹차로 만든 것은 죄다 주문했다. 그 순간 찻잔을 반납하던 한 손님이 카페 매니저에게 “차 정말 맛있네요”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불현듯 대학시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가 떠올랐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공연 포스터 붙이기부터 생수 판촉, 위탁판매, 전단지 돌리기, 신문 배달, 스탠실 공장, 세차장 등 주로 보수가 센 대신 험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급 두둑한 카페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커피 만드는 법부터 서빙까지 두루 경험한 적이 있었다. 처음 다뤄보는 커피 머신 앞에서 쩔쩔매다 카페 매니저에게 혼나던 어느 날, 카페 사장님이 “오늘 따라 유난히 커피가 맛있다”며 눈을 찡긋하고 사라졌다. 그만 꾸짖으라는 얘기였다. 그 작은 위로 덕분에 용기를 가졌던 기억이 난다.
궂은 날씨에 불운 운운하던 제주도에서의 첫날, 동굴 카페에 다녀온 뒤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그 기분으로 내일의 좋은 날씨를 꿈꾸며 잠자리에 들었다. 


 
-어리목에서 영실로 이동
둘째 날 아침 숙소를 나서기 직전 한라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실시간 CCTV를 확인해봤다. 다행히 산행에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어리목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8시 35분에 1100번 버스를 탄 뒤 영실로 갈 계획을 세웠다. 어리목을 출발해 한라산 윗세오름까지의 여정은 보통 3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눈길을 감안하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을 터였다. 반면 영실은 2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는데다가 코스가 재미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대로 영실에서 출발, 어리목 코스로 내려갈 심산이었다.
어리목 입구의 진입로를 슬쩍 엿보니 나뭇가지에 수북이 쌓인 눈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빨리 올라가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들뜬 기분으로 버스에 올라 영실로 향했다.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아이젠과 스패츠(신발에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발목에 차는 각반)를 장착하고, 등산스틱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눈길을 내딛었다.
“여기서부터 입구까지 1시간 걸려요. 택시타면 1만원!”
택시기사 분들의 말에 순간 귀가 혹했지만,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내 발길을 돌려 영실 코스의 첫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눈꽃 세상 펼쳐진 영실 코스
온 천지가 하얗다. 나뭇가지는 온통 눈꽃이 피어 있고, 크고 작은 바위 역시 눈으로 뒤덮여 흡사 파도 같은 물결을 이룬다. 난생 처음 도전하는 눈꽃 산행이라선지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사가 절로 났다. 그 많던 잡념이 모두 사라지고 추운 날씨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버렸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실성한 사람처럼 눈밭에 뛰어들었다. 영화 ‘러브스토리’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뿔싸, 기대한 ‘러브스토리’의 ‘간지’ 나는 모습 대신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눈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민망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그 상태로 한참을 누워 있으려니 슬슬 눈이 차갑다는, 바람이 차다는, 온몸이 춥다는 느낌이 엄습해왔다. 
“안녕하세요. 즐거운 산행하세요.”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에 정신을 차린 뒤 벌떡 일어나 또 다시 산행을 계속했다. 초반 코스는 꽤 가파르다. 눈길을 오르는 길이 그리 만만치 않지만 병풍바위가 나타날 즈음이면 영실 눈꽃 산행의 첫 번째 백미를 만날 수 있다. 제주 곳곳의 오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름 아래의 절경,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풍광이었다.
한참을 더 오르니 영실 코스의 두 번째 백미, 눈꽃 숲이 펼쳐졌다. 차가운 눈에 싸여있으면서도 아늑하고 왠지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순간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며 어린 딸의 험난한 내일을 걱정하시던 아버지 생각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올 한해도 씩씩하고 지혜롭게 살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의 품 같은 눈꽃 숲을 뒤로 했다. 그 옛날 아버지의 손을 놓던 느낌처럼.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하산
눈꽃 숲을 지나니 이번에는 드넓은 평원이 나타났다. 불운한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구름 밑으로 하얀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넘실대는 바다가 보일 정도로 맑은 날씨, 찍는 각도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제주의 하늘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조금 더 올라 윗세오름에 도착하니 기쁨과 환희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감정이 태양처럼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내친 김에 그렇게도 꺼리던 사진 찍히기를 흔쾌히 수락했고, 용기를 내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 다음은 예정된 수순처럼 사발면을 먹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기분에 취해 설경을 만끽했다. 아름다운 설경과 사발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그곳에서 먹는 사발면은 지금까지 먹어본 그 어떤 진수성찬에 뒤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겨울 산행이 미친 짓이라지만, 이런 게 미친 짓이라면 ‘이 아름다운 짓을 수백 번도 더 해 주마’ 다짐하며 어리목으로 향했다. 눈밭에 난 노루 발자국도, 금슬 좋은 까마귀 한 쌍도, 나무에 매달린 고드름도, 얼음을 뚫고 흐르는 약수도 어리목 코스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오후 3시, 여섯 시간의 눈꽃 산행은 그렇게 끝났다. 새해를 다짐하고 마음을 추스르려 겨울 산행을 계획했지만 사실상 거창한 결과물은 없었다. 다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참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노라 말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해 첫 출발을 앞두고 조목조목 계획을 세우는 일보다, 어쩌면 ‘아름답다’는 말이 더 기운 찬 일이 아닐까. 그런 마음을 담아 이번 산행의 희망을 써본다.
“지난 한해 모두 애쓰셨습니다. 슬픔이 기쁨이 되도록, 불행이 행복이 되도록 제주에서 만난 아름다운 기운을 여러분께 나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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