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위에 아름다운 나눔의 꿈을 그리는 소녀들
가을햇살이 눈이 시리게 쨍쨍한 토요일 오후. 중원구 상대원1동 가파른 골목길에 자리한 ‘책이랑 도서관’의 담장 울타리가 눈부시게 하얗다. 달라진 도서관을 보고 어느 샌가 동네 개구쟁이들이 바람같이 달려온다. “와! 그림 그린다. 이거 뭐하는 거예요?”신기한 듯 돌아보며 그림 속 동화의 내용을 맞추어 본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낡은 담장을 칠하고 예쁜 동화 속 그림들로 채워가는 손놀림이 바빠진다. 마법처럼 도서관을 예쁘게 변신시킨 이들은 마음만큼 얼굴도 고운 수내고등학교 벽화동아리 1,2학년 학생들이다. 담장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말도 없이 맡은 그림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야외 벽화라 햇볕아래 친구는 얼굴이 익었고, 그늘아래 친구는 두툼하게 껴입고 그리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동네에는 놀이터가 없고 좁고 가파른 도로에 차가 겨우겨우 지나다닐 폭이라 길에서 놀기 위험하다. 방과 후 마땅히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책이랑 도서관’은 유일한 놀이터이자 제 2의 집이다. 맞벌이 부부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공동육아 장소로 ‘성남과 함께하는 주부모임’에서 1999년에 만들었다.
양희정 회장은 “이곳은 단순히 어린이 도서관이 아니라 서로 돕고 함께 키우는 마을을 만드는 구심점입니다. 오랜 세월 지나다 보니 낡고 지저분해져서 벽화를 봉사하는 단체에 연락해 보았지만 대기자가 밀려 언제 순서가 올지 몰라 난감했어요. 그러던 중 중원청소년수련관의 추천으로 수내고 벽화동아리를 알게 되었죠. 벽화의 그림은 도서관에 어울리도록 학생들과 의논해서 동화책 속에 나오는 장면들로 선정했습니다. 밝고 예쁜 그림들이 아이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도서관이 주변이 깨끗해져서 학생들에게 너무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벽도 많았지만 여섯 명이서 아침 일찍 시작한 작업은 컴컴해져서야 끝났다. 온몸이 얼룩덜룩 페인트 범벅이고 많이 지쳤지만 오늘 하루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어 기쁘다며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키보다 높고 넓은 벽을 몇 시간 만에 채우려면 완전몰입해서 빨리 작업해야하므로 체력적으로도 성격적으로도 와일드 할 것이라는 리포터의 편견은 이들의 모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조심스럽고 꼼꼼한 이들은 말도 조용조용, 조신하다. 외유내강이란 이들을 두고 한 말일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수내고 벽화동아리의 회장 이경은(2학년) 양은 지난해 4월 대학로에 있는‘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이라는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주관하는 벽화모임에서 벽화를 처음 접했다. 벽화 참여를 해본 미술학원 친구의 말을 듣고 벽화 홈피를 통해 찾아갔다. 작은 도화지가 아닌 커다란 벽면에 그림을 그리고 도시 미관을 바꾸는 일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근 1년간 활동했지만 활동 무대가 서울로 거리가 멀다보니 매주 참석하며 학업과 병행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 안에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고 싶었죠. 그런데 학교에서는 동아리지원금을 지급할 수 없기 때문에 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개인 사비를 걷어 활동하고자 했으나 이 또한 허가가 나지 않았죠.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이은영 선생님께서 분당구청에 민원을 넣어보라고 하시더군요. 구청 홈피에 질문을 올렸고 동아리 개설담당으로부터 정자청소년수련관에 가보라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이승훈 선생님의 도움으로 정자청소년수련관에 벽화동아리를 만들 수 있었죠.”
정자청소년수련관에 둥지를 튼 벽화동아리는 청소년 문화존 활동을 약속하고 동아리 지원금도 받게 되었다. 활동비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봉사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학교동아리로 등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처음에 학교동아리로 만들 수 없다고 했을 때 포기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하겠죠?(웃음) 방법을 찾고자 하니 많은 분들이 도와 주셨고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어요.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해결책을 찾는다면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양의 말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동아리가 만들어 진 후 적극적으로 벽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정자청소년수련관 지하 1층과 4층 공연장 복도 벽화를 시작으로 강화도 도래미마을 연꽃정자를 연꽃을 모티브로 칠했다. 찻집도 들어가고 아파트 관리실도 찾아가며 벽화를 그려드린다고 소문을 냈다. 수련관 벽화를 보고 광주 퇴촌 애견센타에서 벽화요청이 들어오기도 하면서 작품이 광고를 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순 없다
허윤정(2학년) 양은 “경은이가 벽화동아리를 하자고 제안해 시작하게 되었어요. 6명의 친구들이 모여 동아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 사회성도 길러지고 한 달에 한두 번 작업하러 나가니까 많이 부담스럽진 않아요. 이제 후배들을 뽑아 13명이 함께 일하니까 든든해요”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봉사점수를 주는 동아리활동이다 보니 많은 후배들이 지원해 부원을 선발하는 과정도 꽤 진지했다. 그림 실력보다는 그림을 좋아하고, 함께 공동 작업이 가능한 원만한 인성을 가진 후배를 면접을 통해 선발했다고 한다. 이경은 양은 “벽화활동은 방학과 주말을 이용해 하루를 꼬박 작업하게 되므로 자율적으로 성실하게 참여할 수 있는 있는 경우만 참석해요. 멀리 함께 가는 경우가 많아 대충 출석만 하고 점수 받으려는 생각은 통하지 않죠. 최대 1일 8시간 받을 수 있지만 더 걸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선발이 좀 까다로운 편입니다. 그만큼 부원들끼리 친하고 선후배간 거리가 없죠. 3학년이 되면 동아리 활동을 못하게 되어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계속 하고 싶어요.”
홍다원(1학년) 양은 벽화작업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있다. “블로그를 보고 인천해양경찰서에서 벽화를 요청해왔어요. 그림이 재미있어서 원래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벽화를 보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봉사시간도 받으니 1석 3조 이상의 보람이 있어요.”벽화동아리 친구들은 “벽화는 많은 사람들이 오래 두고 볼 수 있으니까 더 보람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지윤 리포터 jyl2011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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