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지역내일 2012-09-19

윤석인/희망제작소 소장

며칠 전 몇몇 조간신문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만일 내가 편집책임자라면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둘러싼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후보와 홍일표 대변인 사이의 갈등을 다룬 기사 대신, 박형규 목사의 민청학련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구형한 검찰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올렸을 텐데….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이 '장준하 선생 타살' 의견을 밝혔다는 기사를 사이드 톱으로 편집하고….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습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한민국 검찰이 어떻게 이런 멋진 논고를 할 수 있는가? 정말 그들의 역사인식이 180도 바뀌었다는 말인가? 이명박 정부 출범 뒤 민주주의가 퇴행하면서 정치검찰에 대한 비판이 비등했는데…. 더욱이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은 최근 박근혜 후보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미묘한 시점에 절묘한 논고가 나온 셈이다. 검찰 논고의 진정성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정말 반갑고 기분 좋은 기사였다.

정의화 새누리당 의원이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와 관련해 트위터에 올린 글도 산뜻하다.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 타살이라고!" 이 사건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것이어서 박 후보에겐 민감한 사안이다.

신선한 충격 준 검찰 논고

야권에선 즉각 진상 재조사에 나서라며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새누리당 몫으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중진의원이 신경외과 전문의 자격으로 내놓은 '소견'이 소중해 보이는 까닭이다.

반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둘러싼 새누리당 내부 갈등 기사는 왠지 좀 찜찜하다. 홍일표 대변인이 사과한 데 대해 박 후보가 사전 보고받은 바 없다면서 이를 부인했다는 것이 요지인데, 대서특필하기에 앞서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특정 정당의 갈등을 부추기면서 박 후보의 사과를 우회 압박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물론 대통령선거에서 모든 후보에 대한 '성역 없는 검증'은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박 후보가 인혁당 사건을 두고 "대법원에 두 가지 판결이 있다"고 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발언이다. 법치국가에서 재심 판결이 갖는 의미를 모르는 발언인 데다, 우리나라 법원이 지금도 과거 독재정권 때처럼 정치적 잣대로 판결한다고 생각하는 박 후보의 잘못된 인식체계를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후보의 '사과' 문제는 좀 미묘하다. 본디 사과라는 것은 진정성이 핵심인데, 여론에 밀려 억지춘향으로 사과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사과를 한다면 그 또한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정치적 어법'이란 관점에선 박 후보가 이미 밝힌 '깊은 이해와 위로'를 상당한 사과로 받아들이는 국민도 적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박 후보가 인혁당 희생자들을 '친북좌파' 또는 '체제 전복세력' 등으로 비유해왔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민주인사라는 분들 중에는 진정 민주화에 헌신한 분들과 민주화라는 탈을 쓴 친북좌파가 있다"고 밝혔다. 최근 '다른 의견이 있다'고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겐 부관참시와도 같은 색깔 덧씌우기 발언이다.

사상검증은 청산해야 할 유산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에 대한 사과 요구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박 후보 나름의 신념체계를 바꾸라는 역(逆)사상검증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 사상검증은 과거 독재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할 때 동원하던 전가의 보도였다. 최근 야권 안에서 종북주의 논쟁이 일어 당혹스럽긴 하지만, 사상검증이야말로 시급히 청산해야 할 치욕스런 유산이다.

과거 최대의 피해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분노가 목젖까지 치밀어도 인내하고 용서하며 말을 아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이 땅에 꽃피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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