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박형송 교사와 인터뷰하면서 떠올린 단어였다. 흔히들 교사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외딴 섬’에 사는 직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흐름을 짚어내는 예리한 ‘촉’을 가지고 있었다. 비결은 끊임없는 공부였다.
세상이 담긴 수업교재로 학생과 소통
“외국어는 필수니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골백번 말로 하는 것보다 동대문 시장 풍경 찍어다 동영상으로 보여줍니다. 나이든 상인들이 일어, 중국어, 영어, 심지어 러시아어까지 하며 외국인과 흥정하는 모습들이죠. 글로벌화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는 걸 보면 아이들도 외국어의 필요성을 수긍합니다.”
박 교사에게는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 연예, 해외토픽 등 세상만사가 모두 수업교재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컴퓨터 외장하드에는 공들여 모은 영상과 사진 파일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뉴스영상, 해외토픽, 영화, 유튜브 동영상 자료, 심지어 뮤직비디오까지 다양하다. 이 자료들은 수업시간마다 적재적소에 활용된다.
“말로만 하는 훈계조 강의에 아이들은 반응하지 않아요. 고교생들이 관심가질 만한 이야깃거리로 화두를 던진 뒤 흥미진진한 영상을 짧게 편집해 보여주며 공감대를 만들어요. 그런 다음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여요.” 연구부장인 그는 동료교사들에게도 학생들이 ‘흥미’를 끌 수 있는 교수법 개발을 늘 강조한다.
자기주도학습 ‘군불 떼기’
교직 경력 28년째인 박 교사는 수년간 고3 담임을 맡아 입시 최전선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진학 관련 내공을 쌓았다. “초중고교 내내 학생들을 평가하는 잣대는 성적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공부를 썩 잘하는 상위권 학생들조차 본인의 삶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공부만 하는 거죠.” 공허한 입시 지도에 회의감이 몰려왔던 그는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진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진로, 학습법, 잠재력 개발까지 아우르는 ‘자기주도학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교원연수는 물론이고 자기주도학습 분야의 권위 있는 대학교수들 강의를 모두 찾아다니며 ‘실체’를 연구했다. 현장과 거리가 있는 이론 중심의 강의에 한계를 느끼자 따로 마인드맵 전문 강좌까지 수강하며 교실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자기주도학습 방법론을 개발했다.
“네 꿈이 뭐니?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없어요’ 라며 짤막한 답변이 돌아와요. 꿈을 버거워하는 아이들에게는 우선 호기심부터 찾아주기부터 시작했죠.” 보성고 출신 선배들의 사례부터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시큰둥했던 아이들도 조금씩 마음을 움직인다.
박 교사는 동료 교사들과 의기투합, 자기주도학습TF팀까지 만들어 공동 연구하고 실전에 적용시킬 만큼 열의를 보이고 있다. “고교 첫 시험이 고3까지 간다, 고3 첫 모의고사가 곧 수능성적이다. 반에서 몇 등까지만 ‘인 서울’ 할 수 있다. 이런 속설에 현혹되어 시도조차 안하고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아이들에게 이런 고정관념을 뒤집은 선배들의 사례를 수집해 최종 결과를 제시해 줘요. 선배 동영상 인터뷰까지 보여주면 아이들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합니다.”
교육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
학생 대상의 자기주도학습 캠프는 물론 학부모 아카데미도 꾸준히 열고 있다. “교육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과도한 선행학습을 부추기는 학원들의 ‘불안 마케팅’ 전략에 학부모들이 말려들면 안 되죠. 소규모로 열리는 부모 강좌 단발성이 아니라 33시간 집중 교육으로 진행합니다. 입시, 진로, 학습법 관련 그동안 학교에서 쌓아온 내부 데이터를 공개합니다.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의 허심탄회한 건의사항도 듣고 있어요. 마지막 날에는 교사, 학부모 1:1로 학생의 진로 설계를 위한 컨설팅도 함께 진행합니다.”
더디지만 노력의 결실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전교 100등에 머물렀던 학생이 10위권 안으로 급상승하는가 하면 몇 달간 공부를 아예 접었던 학생이 마음을 다잡고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코앞의 대학 진학 뿐 아니라 40대까지 어떻게 살아갈지 인생로드맵을 그리게 하며 끊임없이 격려해준 덕분이다. 박 교사는 이런 노력을 ‘군불 떼기’라고 말한다. 지금은 미지근하지만 언제가 펄펄 끓을 만큼 확산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에너지원이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자포자기하고 교실에서도 아웃사이더가 되어 버린 하위권 학생들에게 ‘길’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특성화 전문대나 장학금 받고 공부할 수 있는 외국 전문학교를 발굴해 이 아이들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식 밑천’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잠재 DNA를 이끌어내는 일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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