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마을이야기⑥ 신풍*장안동 마을사람 발전위원회

낡은 골목에서 희망, ‘사람’을 만나다

지역내일 2012-10-10 (수정 2012-10-10 오후 6:32:28)

“다녀보니, 옛길(골목)이 그렇게 많더라고요. 골목골목을 어찌어찌 돌아 나온 곳에 화서문이 딱 보이는데, 얼마나 신기하고 감개무량하던지….” 일인자감자탕 사장이자 신풍?장안동 상가번영회장 황현노 씨의 첫마디였다. “나혜석 생가 앞으로 길이 난 건 얼마 안 돼. 여기 일대가 죄 배추밭, 호박밭 천지였거든.” 골목대장 이영숙 씨가 기억 속 장면을 그려낸다. 그들에게 골목은 오랜 세월 닳고 닳은 빛바랜 흑백사진이었다. 그런 흑백의 동네에 초록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건 지난해, 골목에서 희망, ‘사람’을 만나면서부터다. 


달라진 게 뭐냐고? 마을을 움직일 사람을 일구다
유형의 결과물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신풍동, 장안동의 현재모습은 ‘이게 뭐야?’라는 반응을 불러올지 모른다. 리포터도 그랬다. 황현노 상가번영회장이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마을에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돈은 어디다 쓰고, 그동안 뭘 했느냐고 묻는 거죠. 그런데 일일이 답변하기 어렵더라고요.” 그가 내민 그간의 기록을 담은 책 한 권을 보고서야 이유가 짐작이 됐다. 마을 만들기 교육, 북촌한옥마을 등 선진지 답사, 마을 현장조사, 골목대장 발굴, 마실 다니기, 한줄시 드로잉 등 빼곡한 일정들. 그 과정에서 ‘이걸 어떻게 해’, ‘난 못해’로 일관했던 어르신들이 달라졌다. 거침없는 상상력을 뽐내고, 시낭송회도 했다. 쓰레기로 방치된 골목에 꽃을 심고, 화분을 가져다놓는 등 작은 화단도 만들었다. 길가의 화초에 자발적으로 물을 주는 사람도 하나둘 생겨났다. 나혜석생가터문화예술제에 참여했던 이형옥 씨에겐 ‘생활의 기쁨’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골목대장들에겐 이전엔 없던 자부심이 깃들였다. 골목이 조금씩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곳곳에선 정겨운 골목길, 나혜석 고향길, 이야기가 꽃피는 신풍동마을 등 마을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가지 치듯 풍성해지는 움직임이 새삼 고맙고, 위안이 됩니다. 신풍*장안동 발전위원회를 얼마 전에 화서문로 신풍*장안동 상가번영회로 바꾼 것도 골목과 연계한 상가의 활성화를 모색해보자는 취진데, 앞으로 잘 해봐야죠.” 황 회장이 씩 웃어보였다.   

 
우리 마을을 알자, 골목 대장집 마실 다니기
화려한 수원화성 뒤에 가려진 오래된 주거단지, 전국 최대의 점집이 몰려있는 곳, 60대 이상의 어르신이 대부분인 쇠락한 동네, 신풍*장안동은 그런 곳이었다. 신안발전협의회(신풍?장안?북수동)로 뭉쳐봤지만, 북수동에만 이는 변화의 바람 덕에 상실감마저 파고들었다. 급기야 도종환 위원장과 황현노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신풍*장안동 마을사람 발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수원KYC의 도움으로 ‘골목대장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첫 단추를 꿰었다.
“신풍동에서 나고 가정까지 이뤘으니까 한 68년 됐지, 그만큼 마을의 유래를 더 많이 알지 않겠느냐며 골목대장을 해보라는 거야.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뿌듯하긴 하더라고.” 서덕천 어르신뿐만 아니라 함께 자리해준 홍규선, 이영숙 골목대장에게서도 오래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곳을 스쳐간 정치인들, 우물 파던 일, 움막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던 새마을 운동 시절 등 살아있는 역사가 꿈틀댔다. 각자가 가진 옛 그림들이 한데로 어우러지면서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마을의 방향도 그릴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마을사람들이 골목대장집 마실을 다니며 나눴던 먹거리들, 이웃 간의 살뜰한 정(情)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적게는 30~40년,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사는 맛’이 이제야 좁은 골목 안을 누빈다. 문패달린 골목대장 집은 언제나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젠 생태교통 페스티벌, 마을일에 팔 걷어붙이고 나서다
“훨씬 더 많은 골목사람들을 알게 된 의미 있는 활동이었죠.” 프로젝트의 성과를 아우르듯 수원KYC 고경아 대표가 이렇게 말한다. 신풍?장안동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어르신과의 프로그램을 원했고, 그 과정에서 한줄시 드로잉도 진행됐다. 시, 노래, 화투 모든 게 모티브였고, 저마다의 사연에 울고 웃었던 그대로가 시가 됐다. 싹을 틔운 도전은 멈추지 않는 법.
2013년 9월, 행궁동(신풍*장안동 등 12개동이 행궁동에 편입)에서 ‘생태교통 페스티벌(이클레이/유엔 헤비타트 주최)’이 열린다. 석유고갈시대를 가정해 친환경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미래도시 재현 글로벌 프로젝트다. 신풍동과 장안동을 가르는 화서문로가 주 무대.
“이렇게 좋은 길을 이제야 알아봤으니, 미안한 마음이죠. 생태교통 페스티벌의 전초전으로 상가번영회 주최 제1회 화서문로 축제를 열 계획이에요. 서툴겠지만 많이 격려해주세요.”  페스티벌 기간 동안 자동차를 사용 못하는 불편함 때문에 주민들 간 해결해야 할 문제들도 있지만, 이제는 나아갈 힘이 있다고 황 회장은 말한다. 고 대표가 웃으며 한마디 거든다.
“마을 어르신들과 점심으로 동태찌개를 먹다가 생태니, 동태니 하면서 페스티벌을 두고 설전이 오갔어요. 그만큼 마을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발한 의사소통을 한다는 증거죠. 아마도 내년 6~7월쯤엔 훨씬 더 많이 달라진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오세중 리포터 sejoong71@hanmail.net


인터뷰_ 골목대장 고종환, 이영숙 부부

“여기처럼 교통 좋고, 공기 좋은 데가 어디 있다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죠.”
떠들썩했었던 신풍초등학교 이전 문제 때문에 이사를 결심했던 아내에게 고종환 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의 고향이 이제 그에겐 제2의 고향이 된 모양이다.
부부가 사는 안으로 쏙 들어간 집은 왜정 때 지어진 100년 된 오랜 가옥, 미로 같으면서도 아기자기한 공간들에서 세월이 묻어난다. 당시 몇 개 안되던 집 주변으론 온통 배추밭, 호박밭이라 인분 냄새가 끊이질 않았다. 화성 뒤쪽으론 빈민촌도 많았고, 최초의 아파트랄 수 있는 서문아파트도 있었다. “중학생 때인가, 막내 동생 낳은 엄마 챙기느라 아침에 미역국 끓이고, 한데우물가서 물 떠놓고 갔던 생각이 나.” 이영숙 씨는 결혼 후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화성주변이 정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고, 상가도 죽고, 골목도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었는데 마을르네상스는 심드렁했던 그를 바꿔놓았다. 기존의 통장일 뿐만 아니라 골목대장, 최근엔 생태교통 조사원 활동에 적극적이 됐다. 그 여세를 몰아 ‘나혜석 고향길’을 추진 중이다. 안 쓰는 대문을 아트 월로 만들고, 바닥은 스텐실로 꾸미고, 꽃도 조성할 계획이라며 그가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나혜석 생가를 비롯해 골목 곳곳을 안내한다. 간간이 벽화도 보이고, 소담스런 꽃들이 낮은 담장위에 드리워진 모습, 길가에 놓인 화분의 행렬이 정겹다. 골목을 누비다 만난 사람들과 일상을 나누느라 더뎌지는 그의 걸음 속에도 그렇게 희망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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