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 구체제로의 복귀

지역내일 2012-09-10

언론광장 공동대표

유신선포 40년,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나라가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자 유신옹호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박근혜는 5·16 군부 쿠데타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강변한다. 수출증대를 위해 유신체제가 필요했다느니 반유신-반독재 투쟁은 종북이라는 따위의 소리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온다. 박정희기념관-대학원-신당동집 복원, 육영수 생가복원이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다. 구체제(Ancien Regime)의 복귀를 보는 것같아 섬뜩하다.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그 해 8월 장면 내각이 탄생했다. 자유당 독재체제에 의해 억압됐던 혁명적 열기가 장면 내각 출범 이후 민주화의 욕구로 분출했다. 그것을 빌미로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정권이 붕괴되었다. 박정희는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군사통치를 실시했다. 박정희는 민정이양이란 당초의 약속을 파기하고 헌법개정을 추진했다. 1962년 12월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꾸었다.

이 헌법에 따른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15만여 표차로 윤보선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1967년 5월 3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는 윤보선을 이겼다. 4년 전에 비해 표차가 116만여표로 늘어났다. 야권분열 말고도 관권-금권선거가 크게 작용했다. 박정희는 재집권 2년차에 들어서자 장기집권의 마각을 드러냈다. 3선연임 개헌이었다. 1969년 9월 14일 공화당은 헌법개정안을 날치기했다. 새벽 2시 회의장소를 제3별관으로 옮기고 야당한테 통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 헌법에 따라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을 94만여 표차로 누르고 3선연임에 성공했다. 무난한 승리처럼 보였지만 3선 연임에 따른 후유증이 컸고 부정선거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선거기간 중에 김대중은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획책한다고 주장했다.

헌법개정 아니라 헌법파괴

그 경고가 현실로 드러났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했다. 또 정치적 목적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 방송은 사전검열을 실시했다. 대학에는 휴교조치를 내렸다.

이어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유신헌법을 의결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했다. 투표율 92.9%, 찬성률 91.5%는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말해준다. 10월 유신은 친위 쿠데타였다.

유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서 따온 말이다. 이것은 과정-절차-내용-형식면에서 헌법개정이 아니라 헌법파괴(Verfassungsvernichtung)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고 연임을 제한하지 않아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또 대통령은 국회의원 1/3의 추천권과 함께 국회해산권을 가졌다. 입법부의 국정감사권을 박탈하고 연간회의도 제한했다.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판사의 임면권도 대통령에게 속했다. 국가권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삼권분립을 부정했다. 무엇보다도 헌법의 효력까지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국민의 기본권까지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마디로 유신체제는 권력자 1인 아래 법과 제도를 두는 초법적체제였다.

박정희는 긴급조치권을 9차례나 발동했다.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행위는 일체 금지하고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군사재판에서 15년의 징역에 처했다.

장준하, 백기완이 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징역15년을 받았다. 학생의 출석거부, 수업-시험거부, 학내외 집회-시위-농성을 금지하고 위반하면 퇴학-정학시켰다. 반유신 운동으로 1,024명이 수사를 받았고 윤보선, 박형규 등 180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중에서 9명이 사형, 21명이 무기징역, 140명이 징역살이를 했다.

헌정파괴로 점철된 박정희 18년

이 헌법에 따라 박정희는 1972년 12월, 1978년 7월 두 차례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런데 1978년 12월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집권당 공화당의 지역구 득표율이 신민당의 그것보다 1.1% 뒤졌다. 신민당은 김영삼을 새 총재로 뽑고 유신체제에 대한 투쟁을 강화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79년 10월 4일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했다. 그것이 부마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0월 26일 궁정동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그의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총구는 김재규가 겨눴지만 방아쇠는 부마항쟁이 당긴 셈이었다. 이로서 유신체제는 종막을 내렸다. 헌정파괴로 점철된 박정희의 집권 18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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