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웹 사이트 국어사전에서 ‘삼식이(三食ㅡ)’를 찾아보면 ‘백수로서 집에 칩거하며 세 끼를 꼬박꼬박 찾아 먹는 사람’이라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젊은 날 가족 부양의 의무를 다하며 열심히 사회생활을 해왔던 가장들이 은퇴와 함께 이런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갖게 되는 이유는 뭘까? 원인은 밥이다.
어디에 무슨 주방기구가 있는지조차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 남성들은 세 끼 식사를 할 때마다 아내 혹은 딸이나 며느리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게 된다. 외식도 한두 번, 사먹는 음식은 어쩐지 허기가 지고, 대용량으로 만들어 놓은 음식에는 맛과 향이 사라진 것 같다. 이렇게 남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다며 스스로 요리를 하기 위해 모인 어르신들이 있다. 바로 압구정노인복지회관의 ‘건강과 사랑이 있는 밥상’ 강의실에 모인 분들이다.
건강한 식생활과 가사자립이 목적
''건강과 사랑이 있는 밥상''은 서울시 강남구가 남성 노인들의 건강한 식생활과 가사자립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요리 강좌다. 시에 거주하는 60세 이상의 남성 노인 20명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며 퇴직한 남성 어르신들이 요리와 친근해지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손수 만든 요리를 나누어 먹으며 서로 소통하고 나누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기획됐다.
지난 6월 26일 시작해 매주 1회씩 10월 30일까지 이어지는 강좌에서는 밥 짓기부터 된장국, 북엇국, 두부조림, 배추겉절이 등 기본 국과 반찬에서부터 닭찜과 버섯불고기 등 손님상에 올릴 만한 음식까지 차례로 배우게 된다. 수업료는 회당 5000원(재료비)이다.
‘건강과 사랑이 있는 밥상’ 요리교실은 매주 화요일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강남구 압구정 노인복지센터 3층과 강남구 여성능력개발센터 4층 조리실에서 진행된다. 준비물은 앞치마와 빈 용기 2개, 개인 행주뿐이다. 빈 용기에는 하루에 2가지씩 완성되는 실습 요리들이 담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들을 가족들에게 보일 생각에 요리를 마무리하는 어르신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왁자지껄 좌충우돌 요리교실
“여성분들보다 더 적극적이세요. 젊을 때에는 부엌에 한 번도 안 들어가셨던 분들도 있을 텐데 여기서는 궁금한 것도 많으시고, 아주 적극적으로 공부하며 요리하세요. 권위적인 분들은 한 분도 안 계세요. 1회 때부터 수업을 받으셨던 분들은 어느덧 익숙해지셔서 집에서도 요리하시고 수업시간에도 처음 오신 분들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시며 함께 요리하시더라고요. 보는 저도 흐뭇합니다.” 김소영(40) 강사의 설명이다.
실수도 많다. 국이 끓어 넘치는 분, 채소를 너무 오래 삶아 채소가 다 뭉개지는 분, 레시피를 보며 하나하나 순서대로 따랐는데도 양념 중 뭔가가 빠져 맛이 영 이상하다는 분, 남이 갈아 놓은 들깨가루를 남은 것인 줄 알고 버리는 분, 가스레인지 여유가 없어 차례를 기다리다가 요리 순서가 엉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분 등 사연도 가지가지 완성되는 요리 모양도 가지가지다.
“요리에 자신감이 붙은 경우나 복습을 철저히 하는 분들의 경우는 집에 가서 수업시간과 똑같이 한 번 더 해보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한 번은 겉절이를 담근다고 배추를 절였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다음 날 배추를 버리게 되었다는 사연도 들었어요.” 예전 같으면 아내가 들려주었을 음식 관련 에피소드들을 이제는 남성들이 쏟아낸다. 그 옛날 아내가 왜 이런 얘기들을 전하며 안타까워했는지 충분히 공감하면서 말이다.
색다른 아빠의 요리 아내도 아이도 만족
“모르고 먹는 것과 알고 먹는 것은 차원이 다르더라고. 요리에는 재료가 들어가는 순서가 있었어. 난 여태 그걸 모르고 한꺼번에 집어넣었던 거야. 여기서 선생님의 얘길 들고 순서대로 재료를 넣으니까 그 맛이 사네. 요리를 배우다 보니 그간 집안일 하느라 힘들었던 아내의 마음도 이해하게 됐고 사이가 더 좋아졌어. 집에 가서 배운 요리를 다시 해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니 대화 내용도 많아지고 가족 간의 정이 더 좋아진 것 같아.” 황차량(78)어르신의 말이다.
건설회사에서 일했던 고영일(70) 어르신은 “아내는 집안일에서 은퇴가 없잖아. 앞으로 누가 아플지도 모르는데 기본적인 음식은 할 수 있어야 겠다”하는 마음에 요리 교실을 찾았고, 남명희(67) 어르신은 2년간 집을 떠나 부산 근무를 하면서 남자도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아온 경우였으며, 강석주(70) 어르신은 “아내가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가는데 한 번 가면 열흘씩은 집을 비운다”며 “잔뜩 끓여놓은 국과 반찬은 며칠 지나면 먹기 싫어지는데 아내는 갈수록 자주 성지순례를 가니 최소한 몇 가지 반찬은 스스로 요리할 줄 알아야 겠다”는 생각에 요리교실을 찾았다고 한다.
강좌의 최고 연장자인 손형렬(81)어르신은 10년 전 아내와 사별한 후 10년을 자식과 함께 지냈는데 이제는 자립하고 싶어 6개월 전 살림을 따로 나왔다. 그러고 나니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음식. “자식들이 와서 밑반찬을 해놓고 가지만 기본적으로 혼자 살려면 내 손으로 해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아직은 서툴지만 재미있어요”라며 쑥스러워하신다.
다른 걸 배우러 왔다가 요리 교실 소식을 듣고 덥석 등록한 분부터 친구 따라 강남까지 오신 분까지 요리 교실을 찾아온 사연은 각자 달랐지만 요리를 배우겠다는 열정만큼은 모두 뜨거웠다.
요리강좌를 통해 건강하고 즐거운 노후 생활 지원
요리를 배우러 오신 분 중에 할머니 두 분이 눈에 띄었다. 이대 가정과 출신의 82세 할머니와 35년간 교직에 종사했다는 윤 할머니(70)였다. 요리 강좌를 찾아오신 사연을 묻자 “강남구에서 다문화가정 친정부모되기 자원봉사를 하거든요. 그런데 젊은 시절 내내 사회생활에 치여 요리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어요. 친정엄마가 되어 우리 음식을 알려주려는데 내가 하는 건 주먹구구식이잖아요.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 요리 교실을 찾아왔어요. 남성은 아니지만 다행히 선생님이 받아주셔서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라고 하신다.
옆에서 듣던 손형렬(81) 어르신이 한 말씀 보태신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북엇국을 끓여 봤어요. 양념을 하고 육수를 만드는 게 정말 헷갈렸는데 이것저것 넣으면서 해 보니까 조금씩 감이 잡혀요. 선생님이 우리 속도에 맞춰 천천히, 자세히, 귀찮아하지 않고 설명해주니까 점점 자신감도 생기고 좋아요.”
“이번 요리 강좌 프로그램이 퇴직한 남성노인들의 생활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처음 시작할 때는 4~5분 정도 참여하셨는데 최근에는 반응이 좋아 배우고 싶다는 할아버지들이 많아졌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압구정 노인복지회관의 장현진 복지사의 말이다.
이지혜 리포터 angus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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