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간행물윤리위원장
2013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아버지의 일이라도 공정하고 바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보는지를 물었던 것
49년 전인 1963년 8월 30일. 강원도 철원군 지포리 육군 5군단 비행장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완전무장하고 전투태세까지 갖춰 도열한 사단 병력과 전차대, 포병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비에 젖어 오직 한 사람의 당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육군대장. 61년 5월 16일, 학생들이 피로 세운 정권을 쿠데타로 뺏은 뒤 "참신하고 양심적 정치인에게 언제든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고 공언했던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을 뿐 아니라 2년 새 두 개의 별까지 더 달고 예편하는 자리였다.
그가 헬기에서 내리며 식은 시작됐다. '혁명공약'이 낭독되고, 국방장관이 "육군대장 박정희, 명 예비역 편입"이라는 일반명령을 읽은 뒤 전역사가 시작됐다.
"군인으로서 나는 중절(中折. 중간에 꺾어짐)을 맞았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전역사의 이 마지막 문장은 하도 유명해져 그날 그가 한 다른 말은 전혀 생각나지도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이 불운하단 건지,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의 길 대신 정권을 찬탈한 수장이 된 게 불운한 건지, 아니면 훗날 겪을 '진짜 불운'을 예감한 것인지 당대와 후세에 해석만 구구하게 남겼다.
그런데 그날의 전역사를 다시 읽어보면 이런 얘기를 찾을 수 있다. "정통적 의미의 민주주의국가에서 군의 혁명이 그 얼마나 불행한 것이며 또 그 혁명의 악순환이 종국적으로 국가를 쇠망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은 본인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껴왔다."
여기서 그가 말한 혁명이란 바로 쿠데타다. 그러니까 쿠데타가 또 쿠데타를 부르는 악순환을 거듭해 종래 나라를 망치는 걸 알았지만 결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안 지켜진 '민주주의 발전' 약속
그걸 설명하며 그가 여러 차례 사용한 단어가 '불가피성'이다. 그래 61년 5월 16일의 그 쿠데타도 국정문란 사회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비분과 눈물을 머금고 겨레가 피로에 지친 새벽의 수도에 혁명의 총부리를 돌린 것"이라고 규정했다.
어떤가. 며칠 전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5·16을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한 것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는가. 최선의 길을 선택했다는 자부심보다는 '비분과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총부리를 서울에 돌렸다는 변명이 묻어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고? 좋다. 더 읽어보자. 그가 전역사에서 거듭 강조한 게 "군사혁명에 진정 종지부를 찍고", "민주, 공화의 기치 아래 다시는 혁명이라는 고된 시련을 되풀이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그것이 해서는 안될 쿠데타를 했지만 앞으로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꽃피워 겨레에 진 빚을 갚겠다는 다짐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 후의 박정희 16년은 어땠는가. 장기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했고 그도 모자라 다시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체제인 유신시대에 돌입했다. 그런 정권을 지키려고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를 수도 없이 내렸고 죽음의 수렁에 내몰린 사람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 와중에 전역사에서 다짐한 '쿠데타 없는 나라'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과연 있기나 했었던가.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안가에서 최측근의 총을 맞고 서거하는 불행한 대통령이 되었다.
기자들이 박근혜 후보에게 "'5·16'을 어떻게 보는지" 물은 것은 61년 쿠데타, 그 당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뿐 아니라 그 쿠데타로 세워 79년 10월 26일까지 18년을 끌어간 '박정희 5·16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것이었다. 2013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아버지의 일이라도 공정하고 바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보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궁정 쿠데타 일으켜 종신집권 체제로
물론 박 후보가 자부심을 느끼듯 산업화를 이뤄낸 박정희 대통령의 공은 잊어서도 안되고 또 폄하해서도 안된다. 절대빈곤을 추방하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발돋움시킨 리더십도 존경할 만하다.
반면에 쿠데타 악순환을 막지 못했고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이 나라에서 지지부진 천연된 책임 역시 그에게 있는 것도 분명하다.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불운한 군인'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으나 '불행한 대통령'이 되고만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게 딸로서는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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